[아름다운 人터뷰] 이야기, 나를 만나다 / 만화가 김은성

작가의 펜은 사람의 마음길에 닿아있다. 김은성 작가(56)가 10여 년간 손길을 놓지 않은 <내 어머니 이야기>(총 4권)는 직선에서 곡선으로, 곡선에서 다시 직선으로,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나이 마흔에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그녀는 어머니의 생애구술을 채록해 만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냈다. 작가의 40대와 어머니의 80대를 온전히 바친 이 기억의 기록은 탁월한 두 이야기꾼의 언어로 지은 견고한 집이다.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력이 딸의 창작력과 만나 문학적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이야기되는 기억, 기억되는 이야기로. 개인의 역사가 시대의 역사로 수렴되는 깊고 두터운 서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광활한 터에 놓인 질펀한 인생길을 조명한다. 이처럼 삶의 양각과 음각을 판화와 같은 그림체로 새겨낸 그녀를 가을의 문턱에서 만나보았다. 차분하면서도 유쾌한 음성으로 전해준 이야기의 고유한 무늬를 지면 위에 띄워본다. 

“대학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동영상 제작을 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재담을 발견했어요. 특히 이야기의 신선함과 표현력에 놀랐죠. 작가나 변호사를 했어도 잘하셨을 거예요(웃음). 어머니는 관찰력이, 저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에요. 처음에는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쉽게 꺼내지 못했어요. 물론 어머니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요. 그림도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그림까지 그려야 하니 선뜻 용기 나지 않았죠. 1권에서 3권까지는 객관적인 선을 잘 타고 가다가 4권에서 제 이야기를 할 때 어렵더라고요.”

그녀는 같은 이야기도 어머니가 들려주면 더 맛깔나고 재미있다고 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작가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는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기’가 아닐까.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이야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전달되는 것, 이는 이야기의 자장 안에 놓인 작가의 실존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야기로 되살려지고 되살아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떻게 관계의 외연을 확장해나갔을까. “엄마와 나 사이에는 충만감과 만족감이 흐른다(개정판 작가의 글 中)”라는 문장에 잠시 눈길이 멈춰 섰다. 

“그동안 살면서 공허함에 다리가 붕 뜬 것 같았는데, 작업 후에는 충만해졌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그렇게 와닿지도 밀접하게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작품으로 많은 사람이 제 안에 들어왔죠. 종적으로 연결된 느낌이랄까요? 일단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면서 땅에 다리를 붙인 느낌이 들었죠. 시간상으로 위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더 연결될 수 있었고, 더 많이 알고 싶어지면서 충만감이 생겼어요. 지금은 나에 대한 관심과 시야를 횡적으로 확장해가려는 시점인 것 같아요. 어머니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변까지 연결된 거죠.” 

한 장 한 장 그려내고 써낸 순간들은 부유(浮游)에서 정착으로 나아간 자기 확신과 증명의 시간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작가의 뿌리 찾기의 여정은 어머니의 생애를 담으려는 창작욕에서부터 출발한다. 작품을 통해 어머니와 새롭게 만나고 나와 조우하면서 가족이라는 나무로 성장한 것. 그 합일의 장(場)은 삶의 중력을 거스르는 장엄한 춤사위로 승화된다.   

“어머니가 한풀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피나 바우쉬의 춤을 참고했어요. 어머니와 제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인데, 짧게 그려져서 아쉬워요. 도저히 그 분량으로는 담아내지 못했거든요. 돌아보면 작품으로 어머니를 더 많이 알게 됐고, 어머니는 저를 더 신뢰하게 된 것 같아요. 어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들리기 시작했죠. 경청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어요.” 

어머니에게는 놋새(아명)를 비롯한 여러 이름이 있지만, ‘이복동녀’를 가장 좋아한단다. 다름 아닌 자신의 본명이기 때문에. 시대와 시절에 의해 ‘어떤 이름’으로 불리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견뎌온 어머니는 삶의 청자에서 화자로, 오롯이 ‘나’로 명명되었다. 자기 이름의 주인이 되어. 

“이름에는 정말 주인이 있나 봐요. 작품의 제목도 그렇죠. 처음에는 앨리스 워커의 수필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를 보고 이런 제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어머니 이야기’로 달아놓고 불리다 보니 자기 이름 같더라고요(웃음). 군더더기 없는 것을 원했는데, 부합했죠. 어쨌든 많은 사람에게 불리게 되어 너무 기뻐요. 작업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어서 힘들었거든요. 경제적으로든 건강상으로든. 한 편 한 편 들으면서 끝까지 그릴 수 있었고, 그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액자 구조로, 일제 강점기 함경도 북청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머니가 광복과 6.25를 겪으며(1·2권) 피난민으로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충남 논산에 새 터전을 잡고(3권), 이후 1970년대 말 서울로 거처를 옮겨 삶을 이어온(4권) 가족사를 내화(內話)로, 이를 현시점에서 듣고 있는 상황을 외화(外話)로 구성하고 있다. 이 방대한 시간과 공간에 들어선 서사는 작가의 무덤덤하고 담백한 어조에 실려 감성을 일깨우고 감정을 어루만진다. 희비극적인 요소를 견인하는 적절한 톤앤매너로 심리적 거리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재미와 의미를 더한 것이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헤어지는 장면은 들을 때도 그리면서도 책으로 볼 때도 가장 애잔하고 마음이 아파요. 어머니 역시 7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고 하셨죠. 남한으로 와서는 어머니의 어머니 자리를 대신한 존재가 외숙모였어요. 두 분은 마음을 터놓는 각별한 사이였죠. 어쩌면 과거를 잊지 못하는 건 해결되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어서일 거예요. 누구나 그렇지만, 그분들은 큰 사건이 있을 때 사셨으니….”

잘 알려진 대로 <내 어머니 이야기>는 tvN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소설가가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이라고 극찬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강렬한 빛과 날개를 달았다. 당시에는 절판된 상태였지만 재출간 후 바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많은 이들이 알아본 수작이 된 것이다. 개별성을 넘어 보편성을 확보한 이 작품은 내 어머니 이야기에서 네 어머니 이야기로, 다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제야 제자리에 앉은 것 같다는 그녀가, 그녀의 펜이 닿을 곳은 어디일까. 

“앞으로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움이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더라도 우선 제 생각에 괜찮은 작업을요. 큰 서사가 아닌 모든 사람이 겪는 일상의 작은 이야기를 저만의 시선으로 담아보려고요. 세상과 사물, 내면을 잘 들여다보는 통찰력으로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지향점이죠. 결국 작가는 자기에게 가장 크게 와닿는 것을 써내야 하는 것 같아요. 해소해야 할 것들을. 흰 종이를 보면 뭔가를 막 그리고 싶더라고요. 잘하든 못하든 그림 그리는 느낌 그 자체가 좋거든요(웃음).”

힘겨운 삶을 힘주지 않고 힘 있는 서사로 담아낸 그녀는 잊히지 않는 기억을 잊지 못할 이야기로 남겼다. 이로써 접힌 시간은 펼쳐진 시간이 되었다. 다가올 이야기는 삶을, 삶은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당길까. 새로운 작품의 춤사위가 기다려진다. 

 

. 사진 김신영 편집장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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