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 / 이시원, 배우

한 유명작가의 말처럼 사람마다 내면에 품고 있는 작품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볼 때마다 감탄스럽고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그것은 책이기도, 노래이기도, 영화이기도, 또 사진 한 장이기도 하다. 내게는 그것이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 Miss La La at the Cirque Fernando>(1879)이라는 그림이다.

나의 첫 꿈은 화가였다. 연필을 잡을 수 있는 나이부터 스케치북에 온갖 상상력을 담아 그림을 그리는데 푹 빠져있었다. 학교에 들어가 장래 희망을 화가라고 적었을 땐 이미 화가가 된 것 같았다. 당연히 제일 좋아하는 책은 여러 화가의 작품을 모아놓은 미술책이었고, 서점에 가면 꼭 한 권씩은 어린이를 위한 세계명화집 같은 제목의 책을 골랐다. 고화질로 인쇄된 크고 무거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꿈도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 서점에 다녀온 어느 날, 한 그림을 보고 깜작 놀랐다. 입으로 외줄을 물고 자기의 온 무게를 버티는 여자의 모습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말 그대로 일시 정지 상태였다. 한참을 넋이 나가 있다가 다른 그림들도 봐야지 하며 책장을 넘겨도 계속 떠오르는 것은 공중에 매달린 라라양이었다. 뒤에 있는 그림들은 대충 보다시피 하고 얼른 다시 서커스 현장으로 돌아와 여자가 떨어질까 봐 손에 땀을 쥐고 보듯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지 라라양이 목숨을 걸고 곡예를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독특한 구도 때문이었다. 바로 밑에서 라라양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신선했다.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지만 드가의 시선을 닮고 싶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놓치는 각도를 포착하고 싶었다. 본래 타고난 엉뚱한 성격과 드가에 대한 동경이 더해져 나는 새로운 취미이자 특기를 만들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뭐든지 그 안에 남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점들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하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가끔 심심하면 라라양을 꺼내 보기도 했지만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학생이란 직업은 너무 바빴다. 정답이 정해진 시험 문제들을 풀기 위해 본성을 감추고 거의 십 년 가까이 라라양을 잊을 정도로 순응적이었던 그 시절의 내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입시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라라양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하면서 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을 직접 만났다. 다시 만난 그 그림은 익숙하면서도 신기했다. 열혈 팬이었던 스타를 직접 본 느낌과 비슷할까? 어릴 적 처음 본 순간부터 오래도록 나를 휩쓸었던 감정까지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는 사진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물의 동작을 순간 포착하여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나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점은 무대 뒤 같은 뜻밖의 장소에서 바라보는 시점과 공연 중이 아닌 쉬거나 놀고 있는 의외의 순간을 그리는 데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고 그 당시 무희나 서커스 단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알고 보니, 발레 수업을 하는 고된 무희와 이른 아침 해장술로 압생트를 마시고 있는 여인의 외로움과 공허함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 드가의 시선에 매료됐던 이유는 단순히 독특한 구조를 넘어 상대적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관심 없는 한 사람의 서사를 담아내는 능력에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배우 일을 시작하고 가장 많이 받는 인터뷰 질문 중 하나가 연기를 하게 된 계기이다. 한 가지를 꼭 집어 말할 수 없어서 매번 어려운 질문이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본 것부터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한 성격이라든지, 대학교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것과 데뷔 타이밍까지, 여러 가지가 맞물려 시작하게 된 것 같다. 그 와중에 분명 라라양도 한몫을 했다. 배우는 자기가 가진 기존의 시점에 갇혀 있어서도 안 되고, 갇혀 있을 수도 없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 인물이 되어 인물의 입장에서 상황과 타인을 바라봐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이든 대상이든 요리조리 돌려가며 즐겁게 관찰하던 나는 이 일이 그래서 참 재미있다.

최근 KBS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역사적 사건이 기록하는 사람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음을 배우고 있다. 더 재미있고 풍부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열심이다. 매회 전문가와 패널들의 얘기를 들으며 이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저 사람은 저런 관점으로도 보는구나생각한다. 라라양은 지금도 내게 다른 관점으로 보는 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법까지 가르쳐주고 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역사일 때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과거일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기록들을 더 정성을 다해 다양한 구도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페르난도 서커스의 라라양이 열심히 활약하는 요즘이다.

 

 

*1987년 출생. 서울대 경영학과 학사(인류학 복수전공), 동대학원 진화심리학 석사. KBS 드라마 <대왕의 꿈>(2012)으로 데뷔. <역사저널, 그날> 출연 중.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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