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긴 편지 뒤에 오는 것 / 이도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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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이 나온 뒤로 꾸준히 독자들의 메일을 받곤 했다. 그 가운데 유난히 인상적인 메일이 있었는데, 계절마다 차분하고 정감 있는 말투로 일상을 조곤조곤 전해오던 누군가의 편지였다. 친근하지만 과하지 않고, 자유롭지만 매너를 잃지 않는 편지. 차츰 나도 성의를 담아 답장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담담하게 꺼내는 하루의 이야기가 좋았다.

배추를 샀습니다.

배추된장국을 끓이려고요.

부모님이 내일 저녁에 오십니다.

된장국을 가장 드시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집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보리차를 끓이고

그동안의 행적을 읽힐 만한 시원찮은 물건들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런 답장을 썼다.

저 문단 모양이 예쁩니다. 계단 같지 않나요?

가장자리에 작은 화분을 차례차례 올려놓은 계단.

누가 그러더군요. 문단 모양이 비슷하면 닮은 사람들이라고.

내용이나 정서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글의 문단이 비슷해서 닮았다니.’

그렇게 소식을 전하다가 어느새 7년이 훌쩍 흐르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구나. 추신처럼 봄이 오면 만나요. 가을에 단풍 예쁠 때 만나요.’ 인사말을 나눈 적도 있지만 그뿐이었다. 뭐가 걸려서 직접 만나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상대방을 실망시키면 어떡하나. 책과 편지로 느꼈던 이미지가 있을 텐데 막상 만나보니 많이 다르다고 느끼면, 지금의 아슬아슬한 우정도 빛바래지 않을까. 괜한 염려가 가로막으로 존재했나 보다. 마침내 이듬해 나는 이렇게 썼다.

그냥 며칠 뒤에 만나요. 봄이 가기 전에요.

서울 어느 동네에 살고 계신가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그녀도 그러자고 약속했고, 편지를 주고받은 지 8년 만에 우리는 대학로 카페에서 만났다. 신기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말투도 편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늘 만났던 이들처럼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이제 함께 나이 들어가는 좋은 친구다. 봄이 오면 올해도 힘내자고 응원하고, 가끔 만나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본다. 아마 평생 친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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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무민 시리즈 작가 토베 얀손(Tove Marika Jansson)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뭉클해지고 말았다. 얀손의 독자이자 팬이었던 일본 소녀와 몇 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 일부분을 발췌해 놓았던 것이다. 열여섯 살 소녀는 그 나이에 맞는 열정과 순수함으로, 먼 이국땅 핀란드 작가에게 고백한다. ‘얀손 선생님, 저는 핀란드를 방문할 돈을 모으고 있어요. 선생님을 뵙고 책과 인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어요.’

얀손은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고, 소녀가 자랄 때까지 좋은 우정은 계속되는 것 같았다. 몇 년 뒤 소녀는 다시 편지를 쓴다. ‘돈이 다 모였어요, 선생님. 이제 핀란드에 갈 수 있게 되었답니다.’

얀손의 답장은 책에 실리지 않았지만 소녀의 다음 편지는 이러했다.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핀란드의 숲은 깊고 바다도 넓지만, 선생님의 집은 작다는 것을 저는 이해해요. 손님이 오래 머무르기엔 어렵다는 것을요. 이렇게 또 배웁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을 때, 나는 그 에세이를 얀손이 아니라 소녀의 마음으로 읽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경하는 사람을 찾아가려고 꼬박꼬박 돈을 모았던 동쪽의 소녀. 먼 나라의 작가는 사려 깊고 좋은 멘토였지만, 막상 개인적인 공간에 선을 넘어오는 것은 정중히 거절했던 것이다. 소녀는 애써 의젓하게 이해한다고 대답하며 뜻을 접는다. 그 후 소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집안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영영 핀란드에 가지는 못한다.

자주 만난다고 다 진실한 관계일 리 없고, 만나지 않는다고 무의미한 관계일 리도 없다. 어떤 이들은 여러 이유로 서로를 배려하다 못 만나게 되기도 한다. 얀손의 거절은 소녀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어떤 기준이었고, 어린 소녀가 그걸 이해했다는 게 나는 마음 아프면서도 고마웠다. 인연이라 생각되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만나거나 만나지 않음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어떤 선택도 그 애정에 대한 단순한 척도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저서로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잠옷을 입으렴><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토베 얀손 <두 손 가벼운 여행>(민음사, 2019) 

사진/ 김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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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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