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 인연들 / 김성규, 세종문화회관 사장

피천득 시인의 수필집 <인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알지 못하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생겨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 있다.’ 우리의 삶은 만남의 연속이고 그 만남이 주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삶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좋은 인연을 알아채고 잘 살리고 있을까.

내 삶의 첫 번째 만남은 아버지와의 만남이다. 물론 내가 선택한 만남은 아니지만 이 만남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과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6·25 때 월남한 실향민이다.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해 노력 끝에 서울대 공대에 진학하셨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난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수학에 흥미를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두 번째 만남은 숫자와의 만남이다. 공대를 졸업하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누나도 남동생들도 모두 공대에 진학했는데, 당연히 공대에 진학할 줄 알았던 나는 당시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문과를 선택해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던 나는 회계라는 분야를 접하면서 다시 한번 눈이 번쩍 뜨였고 숫자를 보는 재미가 더 커졌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나를 회전곰이라고 불렀다. 듬직한 외모에 비해 비상한 두뇌를 가진 외형적인 모습을 곰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렇게 난 점점 숫자가 주는 매력에 빠져 지냈고, 결국 공인회계사 시험을 보고 회계사가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회계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던 내게 예기치 않은 또 다른 만남이 다가왔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이끌어 준 강준혁 선생과의 만남이다. 90년대가 끝나갈 즈음 어느 예술단의 연봉제 전환 자문을 맡게 되었다. 회계라는 세계는 투입과 산출이 확실한 분야였고, 난 지난 수십 년 동안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지금이야 예술경영이라는 개념이 두루두루 쓰이고 학문으로서도 발전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보편화되기 이전의 시대였고 특히, 예술인들이 느끼는 회계는 더욱 생소한 분야였다. 나 역시 숫자라면 자신 있었지만, 예술이라는 분야는 생소했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 문화기획자 1호이자 문화컨설팅업체인 메타기획컨설팅의 설립자이신 강준혁 선생을 만나게 됐다. 어쩌면 선생과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중하는 선생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분의 예술에 대한 이상적인 견해에 자꾸만 빠져들게 됐고 경외심마저 들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예술과 내가 주장했던 경영은 상충되기도 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예술을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었다. 그분과의 대화와 만남이 늘어갈수록 이렇게 같은 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서 예술에 대해 호기심이 한층 더 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과 경영은 전혀 다른 분야이고 예술가와 경영인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편견을 깨기 위해 난 선생과 함께 예술계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매개자이자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을 전하는 전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관련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정기적으로 문화예술계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문화예술과 경영 사이에서 다양한 소통의 길을 열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 인생의 만남들은 내가 원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난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헛되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단체와 관련한 다양한 사람들을 자주 만났고,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들을 지속하다 보니 어느새 내게 문화예술 전문회계사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만남이 좋은 인연임을 알아채고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모든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것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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