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자국] 너와 나의 연결고리 / 김여진, YTN 앵커

눈 떠보니 긴 시곗바늘이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 방송 시작 이제 15분밖에 안 남았는데. 게다가 오늘은 예고한 대로 정말 중요한 초대 손님이 나오기로 했는데. 혼미한 정신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손에 잡히는 옷에 몸을 욱여넣고 내달렸다. 이럴 때면 집과 방송국이 가까운 게 천만다행이다. 57. 진행자석에 앉자 이제야 현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부스스하다 못해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는 뻗친 머리카락, 옷은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방송 불가 수준이다. 눈앞에 앉아 있는 초대 손님이 진행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 이제부턴 나 혼자 최면을 걸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시간의 주인이다!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이 모든 걸 가릴 수 있다! 절대로 난 기죽지 않는다!’ 

대다수 남성들에게 무시무시한 꿈이 군대 다시 가는 꿈이라 하던데. 난 중요한 방송을 앞두면 꼭 이런 꿈을 꾼다. 어찌나 놀라고 급박했는지 자고 일어난 자리가 땀으로 흥건할 정도라서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다행히 15년 방송 생활 동안 최악의 실수는 아직까지 하지 않았다. 정말 천만다행’, ‘무한 감사드릴만 한 일이다.

2004년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나의 TV 방송 역사는 시작됐다. 카메라에 글씨가 띄워지는 기계를 프롬프터라 하는데, 그 글자들을 한눈에 보지 못하고 좌우로 열심히 눈 돌아가는 게 화면에 그대로 드러났으니 방송 왕초보, 병아리 수준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프로그램은 놀랍게도 초대석이었다. 아무리 내 외모가 스무 살 때 이미 선이 들어올 정도로 성숙해 보인다 해도 대선배들도 어려워하는 인터뷰 프로그램을 는다는 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출연자와의 기싸움에서 지기라도 하면 방송은 엉망진창 한없이 산으로만 가고, 진행자는 바보 천치가 되는 게 인터뷰 프로그램인데 말이다.

약속된 방송 날짜는 다가오고 일단 첫 번째 초대 손님만 생각하기로 했다. 작가가 써준 질문지가 있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아하~ 이분이 여기 출신이구나, 평소에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어라! 이런 발언도 하셨네?, ~ 그래서 이런 정책을 내놓았구나.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과도한 지적 호기심은 방송 당일 새벽까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드디어 운명의 첫 녹화 시간. 진행자만 바뀌었지 녹화 세트장도, 방송 포맷도 그대로인 현장 스태프들의 표정에는 지루한 이 시간 어찌 보내나 하는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다. PD의 영혼 없는 큐 사인이 이어지고 출연자를 어색하게 마주한 채 녹화는 시작됐다.

첫 번째 질문, 준비된 대답. 두 번째 질문, 예상했던 대답. 바로 이때다! “그런데요방송 햇병아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새로운 질문을 쏟아내니 바짝 얼어있던 출연자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일을 하게 된 배경, 그 사람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니 출연자 입에 모터가 달린 듯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계속 이어가!” 신이 난 PD의 주문은 귀에 찬 이니어(in-ear)로 이어지고, 행여 잡음이 들어갈까 봐 애써 웃음을 참는 스태프들 때문에 현장은 이미 온기로 가득 차 버렸다. 사람을 마주하는 나의 방송 이력은 내 안의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며 기분 좋게 시작됐다.

나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일명 휴먼 커넥터’(Human Connector). YTN으로 자리를 옮겨와서도 운명처럼 인터뷰 프로그램은 나의 몫이었다. 딴 세상 사람인 듯 멀게만 느껴지던 유명인도 알고 보면 다 똑같은 사람인 법. 서로 눈을 포개고 존재 자체에 주목하면 누구나 정서적으로 무장해제한 채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공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늘 되새긴다. 그러기에 나는 마주할 사람에 대해 연구하고 또 고민한다. 진심으로 궁금해야 애정 어린 질문도 나온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고뇌의 시간 끝에 악몽이 찾아와도 이제는 괜찮다. 어떤 악조건도 즐겁게 맞받아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으니까. 나는 그저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나의 귀를 열고, 공감의 바다에 몸을 던지면 그만이다. 운명의 시작, 연결고리 인생에 나는 감사한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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