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 찬란한 잔스카 / 최동열, 화가

심한 두통으로 잠을 못 이루다가 바람이 심하게 부는 설산으로 둘러싸인 텐트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서는 다시 잠을 청한다. 히말라야 해발 4000m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새벽에 식사를 끝내고 짐을 양쪽으로 꽉 멘 조랑말 4마리, 가이드와 말지기를 따라 길을 올랐다. 두통과 희박해진 산소로 숨을 겨우 쉬며 바람이 심한 Shingo La(5100m) 정상에 가보니, 잔스카(Zanskar) 산중 마을에서 10살 남짓의 아들과 함께 조랑말 한 마리를 끌고 인도의 큰 도시 Manali의 학교를 향하는 웃음 가득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눴다. 머나먼 등굣길이다.

밤새 언 눈이 햇빛에 녹아 푹석해지면 무거운 짐을 멘 조랑말들의 발이 빠져 움직이기 힘들어져서 눈이 딱딱한 오전에 언덕길을 지나가야 한다. 조랑말들과 가이드, 말지기를 먼저 보내고, 밤새 두통으로 고생한 탓에 행보가 느린 나는 혼자 뒤를 따라 걷는다. ‘빙하에 갈라진 크레바스(crevice)가 위험하다’는 정보는 산소가 부족한 두뇌에 한발 늦게 입력되어 자칫하면 빠질 뻔했다. 

다음 날 아침 미술 도구를 메고 설산이 널린 언덕으로 올라갔다. 보통 히말라야 4,000m에서의 유화 작업은 하산 1주일 전에 작업을 끝내고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유화가 빨리 마르는 잔스카 사막에서는 작업 다음 날 캔버스를 조랑말 위에, 그리고 가이드와 내 등에 메고 말리며 이동할 수 있어서 한 장소에 오래 머물 필요가 없다. 

지세가 좋은 곳에서 며칠 동안 작업하고 다시 떠나는 생활의 연속이다. 아침에 말과 일행을 두고 1시간 먼저 떠나서 혼자 걷는 여정도 있다. 홀로 걷는 히말라야 사막은 현인의 멋진 철학이나 깊은 종교적 생각보다 지나간 잡념들이 먼저 떠올랐다. 작업하러 가는 길은 ‘무슨 작업을 해야 하나’ 하는 설렘으로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매년 히말라야를 다니며 작업할 때, 보통 4,000m에서 보이는 것은 하얀 설산과 검은 바위, 푸른 하늘의 동양화 단색이라 화려한 색상을 좋아하는 화가에게는 고통이었다. 30년 전 라다크 여행에서 수시로 햇빛에 따라 찬란하게 변하는 히말라야 산맥의 모습이 그리워 다시 찾은 것이다. 

빨간색, 자주색, 진녹색, 파란색의 사막산 광물들은 햇빛의 방향이 변할 때마다 색을 바꾸어 캔버스에 색상을 입히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속으로 들어갔다가, 실크로드의 카라반이 되었다가, 다시 전혀 모르는 세상으로 들어가 신나게 캔버스를 헤매는 것 같다. 산맥처럼 주름진 얼굴의 여성이 울긋불긋하고 너덜너덜한 티베트 의상을 걸치고 오른손에 든 마니차(Tibetan prayer wheel)의 돌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염소들을 몰고 지나간다. 나는 미리 챙겨온 점심을 먹고 깊은 계곡을 여러 색으로 바꾸며 작업을 끝낸 후 텐트를 향해 걸었다.

강가의 텐트에 돌아오니 고기 굽는 맛있는 냄새가 난다. 어젯밤 눈표범에 물려 죽은 염소 구이를 안주 삼아 앞에 펼쳐진 설산의 낙조를 보면서 그동안 아끼며 따지 않았던 위스키를 한 잔 따라 마신다. 강 상류로 올라갔던 염소들이 어여쁜 염소지기 소녀를 따라 요란스럽게 내려온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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