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手作] 상상의 여행 / 한정은, 도예가

어린 시절의 나는 무서운 게 참 많았지만 단 한 가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면 행복했고 용기가 생겼다. 어느 날 우연히 잡지에서 반짝이는 유리 집을 본 적이 있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있던 할머니에게 나중에 큰 유리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당당하게 약속했다. 그래서였을까. 미대의 수많은 전공 리스트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도예·유리과’였다. 진학 후 막상 유리를 코앞에서 뜨거운 불에 녹여 작업해보니 낯설고 두려웠다. 반면에 겁쟁이인 나에게 도예의 흙은 친절하고 정다웠다. 주무르는 대로 형태가 이루어지며 순간순간 내 흔적이 흙에 고스란히 번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도예가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졸업 후 도자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마주쳤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양한 인간의 삶과 풍속들에 관심이 갔다. 그 속에서 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멍하니 한인 타운 카페에서 종일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직아이처럼 한국인 특유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어딜 가나 찰떡처럼 붙어 다니는 20대 여성들의 모습처럼. 이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내 모습이기도 하다. 이를 착용해 개인적 공간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한국의 단짝 친구 개념을 의자로 표현했다. 한 사람이 앉기에는 넉넉하고 두 사람이 앉기에는 부족한 사이즈의 세라믹 스툴로 만들어 단짝 친구의 행동을 체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도자기 의자라 조심스럽게 짝을 지어 앉아보던 외국 관람객들에게 한국 문화 체험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어부바 포즈를 항아리로 표현하고, 핸드백을 들어주는 남자친구의 팔을 가방걸이로 표현했다. 벌써 몇 년이 흘러 이제는 그 모습들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를 담은 도자기들은 사라진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추억 앨범처럼 기록되어 있다. 도자기는 각 시대 사람들의 삶과 꿈, 아름다움을 담은 세계임이 틀림없다. 

영국 생활 중 좋았던 점은 박물관, 미술관을 무료로 구경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속 핀 조명 아래 다소곳이 앉아 침묵하고 있는 유물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상상의 여행’을 떠났다. 14세기 흙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관부터 18세기 프랑스 귀족의 허영을 담는 섬세한 그루밍(grooming) 세트까지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폐관 시간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모티프로 ‘앤티크 원더랜드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로코코 서비스’는 18세기 유럽의 토일렛 서비스(Toilet service)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는 귀족들이 사용한 개인맞춤 그루밍 세트를 말한다.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단장하는 모습과 그루밍 세트를 과시하기 위해 침실에서 조찬 모임(The morning levée)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특정 시대상과 인간의 보편적 과시욕이 함께 녹아있는 토일렛 서비스를 보며 나도 침실에서 하는 이 특이한 조찬 모임에 참여했다. 물론 상상으로!  

최근 나의 상상 여행의 행선지는 한국이다. 들여다보면 우리의 시각 문화에도 참 재미난 것들이 많다. ‘기복도 시리즈’는 기복화(起福畫) 중 하나인 ‘어변성룡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힘차게 튀어 올라 용이 되길 바랐던 잉어 그림은 아들의 과거 급제를 염원한 옛 어머니들의 부적과도 같았다고 한다. 나는 부적처럼 복(福)을 구하는 도자기를 만들고 싶었다. 백제 시대 마애삼존불상을 하트 형상으로 만들어 안녕을 빌고 이를 정신적 구원과 소망으로 이어주고자 했다. 

하트 도상은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용도와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하트 형상과 문양을 유지하고 때때로 ‘Love’라는 글씨도 반복적으로 새겨 넣는다. 하트는 현대사회에서 가볍게 소비되기도 하지만, 삶과 정신을 지탱해주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내포하기에 늘 우리 눈앞에 꺼내어 상기시켜주고 싶다. 볼 빨간 얼굴과 익숙한 문구, 이미지를 배합해 수줍은 어조로 로맨틱한 선언을 한다.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따뜻한 환기가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며.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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