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窓] 없어서 보게 된 것들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소통을 방해하는 각종 요소를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노이즈(잡음)이라고 한다. 가령 지나치게 예쁜 여성이 어떤 물건이나 말을 전하러 방문했다고 가정해 보자. 말이나 물건의 내용물 보다 그 여성의 외모에 먼저 눈길이 갈 것이다. 심하면 훗날 전달받은 내용물은 생각조차 나지 않고 그 여성만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명료한 소통을 위해서는 노이즈를 줄이는 기술이 필요하다. 뉴스를 전달하는 앵커는 눈에 튀는 복장이나 화장을 피하는 것이 좋고, 뉴스를 전달하는 언어 역시 중립적이어야 한다. 패션쇼에서 모델이 표정을 자제하면 보는 사람이 옷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민감한 사안을 조율하거나, 중요한 계약을 하거나, 아무튼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 형식은 최대한 투명하고 무취하게 하는 것이 좋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2학기 째 온라인 강의를 하며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어찌 수업이 될까 싶었는데 강의 내용의 전달을 고민하다 보니 핵심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학생들이 소외될까 신경 쓰며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다 보니 화상으로 본 학생의 얼굴이 그동안 교실에서 만난 학생보다 더 잘 기억에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교실에서는 멀리 앉은 학생도 있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학생도 있는데, 고화질 화면으로 클로즈업이 된 얼굴을 매번 보다 보면 뇌리에 생생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놀라운 경험도 있다. 앳된 얼굴의 학생이 학기 말에 연구실로 찾아온 적이 있는데, 키가 훌쩍 커서 깜짝 놀랐다. 역시 미디어가 전하는 현실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는 최첨단 디지털 기기를 쓰며 멀티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직접 만나는 것 만한 멀티미디어는 없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에 분위기 파악까지 모든 소통의 신호들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반성도 하게 되었다. 학생들과 대면접촉을 하지 못해 상담이나 교육에 한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오프라인 상태에서 얼마나 학생들과 충분히 만나고 지내왔을까. 만남이라는 형태의 껍데기만 갖추고 스스로 소통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지낸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제한된 채널을 통해 수업하고 학생을 대하면서 형식의 너울이 사라진 진짜 만남과 교육이란 어떤 건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소홀했던 게 무엇인지 찾아보게 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연주회 중 최고는 몇 년 전 학교에서 소규모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무대였다. 무반주니 당연히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없는 텅 빈 무대에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정경화가 올라와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를 연주했는데, 그렇게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무대를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정경화와 음악만 있는 무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신과 대면하는 인간만 있는 무대. 예순을 훌쩍 넘긴 이 대가는 인생이 결국 그렇게 심플한 것임을 몸으로, 혼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명예나 학식이나 재물 따위는 사라지고 끝에는 결국 나와 내가 대면하는 신만 남는다는 무서운 깨달음을 준 무대였다. 그의 바이올린 선율은 그 대면의 스펙터클을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울림처럼 다가왔다.

학생들이 부쩍 줄어 텅 비다시피 한 캠퍼스에서 내 눈은 (없는) 학생들을 좇는다. 본다는 것은 눈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로 하는 것이다. 학생이 없으니 학생이 보이고, 교실이 없으니 교육이 보이고, 무대가 소박하니 음악이 들린다. 누구에게는 기회의 시간, 누구에게는 힘든 시간, 그러나 모두에게 불확실한 요즘 같은 시기를 보내며 그동안 지나쳤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모든 일이 다 나쁘라는 법은 없나 보다. 삶의 잡음을 다 거둬낸 후 빈자리에 남은 나는 어떤 모습일까.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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