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 생(生)의 빛과 향으로 / 김대섭, 화가

뜨거운 여름이 물러간 자리에는 시나브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새로운 계절, 가을의 전언(傳言)이다. 가을의 자리에는 풍요와 행복이 깃든다. 넉넉한 일상의 빛깔은 더욱더 깊어지고 향은 진해지면서 자기만의 생(生)을 드러낸다. 다채롭게 물들어가는 이 풍요의 계절에는 또 얼마나 뜨거운 생이 존재하고 있을까. 

물성과 감성으로 영글어진 시간, 기억과 추억으로 무르익어가는 세월은 가을의 자리를 미적인 공간으로 완성시킨다. 색과 결의 합으로서, 삶의 아름다운 메타포로서. 일상의 값진 순간들이 응축된 열매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캔버스에 마련해놓은 작은 뜰에 찾아와 반갑게도 일상을 나눈다. 자두, 복숭아, 사과, 그리고 호박은 제각각의 빛과 향으로 화폭에 담겨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가상과 실제 사이에 머무는 실재로서. 

시골에서 성장해온 나는 햇빛의 산물들, 즉 자두와 복숭아, 그리고 사과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친숙하고 정감 어린 이 과일들은 영롱하고 명료한 색으로 계절을 축복해주는 자연의 벗이었다. 

이와는 다른 빛깔로 일상을 채워주는 열매가 또 있다. 바로 가을이면 경사진 들판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한가로운 자태로 누워있는 누런 호박이 그것이다. 과거 배고픈 시절에 끼니를 해결해준 고마운 열매지만, 아마도 이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과 식문화의 변화로 이 누런 열매가 웰빙 식재료로 주목받고 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들판 위에서 가을을 알려주는 열매로 먼저 다가온다. 

언제부터인지 과일을 볼 때면 우주의 행성이 떠오르곤 한다. 그 행성을 따라 마음껏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하늘 가득 수놓아진 수많은 별을 만나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소우주(小宇宙)를 통해 나는 관객들을, 관객들은 나를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어떤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때때로 나는 그림이라는 우주적 세계에서 관객들을 정신적 만남의 지점에 이르게 하고 싶다. 이러한 소박한 만남으로 과일이라는 완성체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전통적인 재료 위에 더해지는 탐스러운 열매들의 새로우면서도 맛깔스러운 해석으로 추억의 맛과 멋을 공유하면서. 그 무한한 세계를 붓끝에 담아내고자 하는 창조적 열망은 오늘도 계속된다. 

내 고향의 산물, 내 어머니의 따뜻한 이미지, 푸른 손을 허공으로 뻗어 나갈 때 확장되는 그리움의 영역은 흘러내리며 이어지는 줄기 속에서 삭이던 마음을 붉은빛으로 이어준다. 그리하여 생명은 순화되고, 그 생명의 힘으로 호박은 그림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내린다. <위대한 개츠비>의 소설가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는 “가을의 상쾌함을 느낄 때 삶은 새로이 다시 시작된다”라고 했다. 생명력 가득한 열매들도, 그것들을 화폭에 담아내는 나도, 그렇게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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