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두고 온 그리운 엄마의 음식

 

김창숙(87) 할머니는 엄마가 그리워지면 요리를 한다. 시장에서 손수 장을 봐서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두부찌개를 끓여본다. 하지만 솜씨를 배우기도 전에 엄마와 헤어져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없다. 희미한 기억의 퍼즐을 맞춰가며 국물을 내고 모양을 낼 뿐이다. 그래도 엄마가 끓여주던 뜨끈한 두부찌개를 떠먹으면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강원도 인제에서 홀로 지내는 김창숙 할머니의 밥상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밥과 김치에 찬거리 한두 개 만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혼자 먹는 밥상이라 가짓수를 많이 차리지 않아도 되고 그마저도 동네 경로당에서 해결할 때가 많아 부족함을 모른다. 그런 그녀가 일부러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싱크대 앞에 제법 오랜 시간 머무르는 날이 있다. 북에 두고 온 친정엄마가 생각날 때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엄마의 음식에는 간장 맛이 많이 났어. 달래를 무칠 때도 간장을 듬뿍 넣으셨고, 두부찌개를 끓일 때도 고추장이 아니라 간장으로 맛을 내셨던 것 같아.”


오늘도 모처럼 새로운 요리가 할머니의 조촐한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아스라한 옛 기억을 더듬어 완성한 간장두부찌개와 달래무침도 소 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두들 배불리 먹지 못하고 어렵기만 했던 그 시절, 고깃국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형편이라 어머니는 대신 두부찌개를 자주 끓여주셨다. 간장으로 국물을 내고 고춧가루로 매운맛을 더한 칼칼한 간장두부찌개가 가족에게는 최고의 별미였다. 특별한 재료는 없었다. 쌀 한 톨도 아쉬울 때라 간혹 반찬으로 먹다 남은 나물들을 마저 넣고 팔팔 끓였다. 봄마다 무쳐먹던 달래도, 겨우내 요긴하게 먹던 말린 시래기도 예외 없이 두부찌개의 맛을 더했다.


 

 


“아들이랑 둘이 사는데 아들이 전기 일을 해서 대부분 현장에 가있고 가끔씩 집에 들어오거든. 나 말고는 먹을 사람이 없으니까 대충 차려먹는데 이따금씩 그 두부찌개가 먹고 싶을 때가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요리인데 말이야.”


대단할 것 없는 음식이지만 두부찌개는 지금도 70년 세월을 거슬러 할머니를 그리운 시절로 데려다준다. 찌개를 한 술 두 술 떠먹다 보면 잠시나마 16살 소녀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녀의 고향은 평안북도 영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배경인 그 영변이다. 그녀도 소월의 시를 종종 읊조리곤 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중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시 낭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웅변에도 능해 전교생들 앞에서 실력을 뽐내곤 했다. ‘세라복’을 예쁘게 입고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시내를 다니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린 소녀의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것만 같았다. 1950년 6월 25일이 오기 전까지는….


전쟁이 터지자 가족은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웬일인지 어머니는 함께 나서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를 혼자 놔두고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16살 소녀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바람결에 실은 소망


몇날며칠을 걸었을까. 진남포항에 다다른 가족은 운 좋게 미군 함정을 얻어 탈 수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와 점점 멀어지는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계속 흘렀지.” 갑판 위 소녀의 눈물이 파도와 함께 하얗게 부셔졌다. 항해 끝에 배는 부산에 도착했다. 그 뒤 가족들은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를 전전하다 김해를 거쳐 서울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고, 그녀는 경찰서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며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오빠의 중매로 동향 출신의 경찰과 혼인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몇 년 가지 못했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엄마가 옆에 계셨으면 무슨 말씀을 해주셨을까? 나약한 모습을 원치 않으셨으리란 건 그녀도 알았다. 혼자가 된 그녀는 더욱 꿋꿋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곧이어 지인의 소개로 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군부대 휴게실 직원으로 취직하여 강원도 전역의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그 시기 새로운 인연을 만나 가정도 다시 꾸리게 되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내이자 엄마의 삶을 시작했다. 군부대 일을 그만둔 뒤로는 흑염소도 키워 보고, 이웃 농장에 가서 일손을 보태며 생활비를 보탰다.

 

 


“남편은 2004년 췌장암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 떠날 때가 되니 나보고 고생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 무뚝뚝해서 생전 그런 말 하지 않는 양반이었거든.”


남편의 말처럼 결코 평탄치 않은 세월이었다. 지금껏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아등바등 살아온 시간들. 순간순간 힘이 들 때마다 고향 영변에서 중학교 다닐 적에 배운 시 한 편을 떠올리며 견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말하는 기쁨의 날이 그녀에게도 찾아왔을까. 크나큰 기쁨이 아니더라도 별다른 근심 걱정 없는 하루를 보내는 요즘이 기쁨의 날이 아닐까 생각한다. 경로당에서 심심할 새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고, 얼마 전에는 강원도경로당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할머니 손맛찾기’ 영상도 찍으며 추억을 쌓는다. 또한 ‘노노케어’ 프로그램에 참여해 용돈도 벌고 있고, 곧 아들과 함께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도 갈 예정이다.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지만 아들에게 한 가지만은 재차 당부하는 그녀다. 훗날 눈을 감으면 화장해서 북쪽 방향으로 뿌려달라고. 바람결에 실려 그리운 고향땅을 내려다보고 어머니와 재회하는 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소망이다.

 

 



글 김윤미 기자 사진 한영희



[출처] 샘터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


포스트 공유하기     
샘터

샘터

정기구독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