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 매듭, 인연을 잇다 / 김은영, 매듭장

 

늘 배우며 살아라. 배움에는 끝이 없다.” 김은영 매듭장(78, 서울시 무형문화재 13)은 아버지 김광균 시인의 말씀을 인생의 좌표로 삼고 한 올 한 올 일상을 엮어왔다.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내딛고 오늘보다 더 나아갈 내일을 향해 삶의 매듭을 지어왔다. 시서화(詩書畵)에 정통한 아버지가 물려주신 문화적 유산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가()의 맏며느리이자 전성우 화백의 아내, 그리고 매듭장이 되어 인생의 제2막을 열면서 더욱 풍요로운 문화적 배경으로 꽃피우게 된다. 그 비옥한 문화적 토양이 살아 숨 쉬는 간송미술관 내 자택에서 그녀가 이어온 인연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혼사가 정해지면서 삶의 방향을 틀게 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매듭장에 관한 신문기사를 봤는데, 너무 배우고 싶더라고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 가면 주인이 손에 쥐여 준 칠보와 조그마한 노리개, 그리고 할머니의 노리개를 볼 때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것을 맺을 수 있나신기했거든요.”

그녀는 약혼 기간에 매듭의 기본기를 닦았지만, 결혼 후 출산과 가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매듭과 멀어졌다. 그렇게 3~4년이 훌쩍 흘러버린 어느 날, 스승 김희진(중요무형문화재 22) 장인의 연락으로 다시 매듭과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온전히 매듭에 집중하기란 결코 녹록하지 않았고,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야 비로소 자신과 대면하며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친정어머니의 말씀대로 꼬부리고 앉아서 진이 다 빠질 정도로쉼 없이 잇고 맺었다. 매듭짓는 시간은 곧 자신과의 유일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하다 보니 어느새 52년이 흘렀네요. 만일 남편이 대학원 공부를 허락했다면 매듭을 그만뒀을 수도 있겠죠(웃음).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계속 묻는 과정에서 동력이 생겼어요. 물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해 강단에도 설 수 있었으니 가족들에게 너무 고맙죠. 남편은 최초로 추상화를 전공한 화가였는데, 서로 색에 대한 의논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께서도 결혼 후에 나이 먹은 딸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에 기특해하시며 조언도 많이 해주셨고요.”

그녀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 김광균 시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모더니즘 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버지는 13세에 시를 발표했고, 영어를 독학하는 등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다. 책을 통해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가며 지적 갈망을 채웠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책을 들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를 유독 잘 따랐던 그녀는 아버지의 추천으로 이화여대에 입학해 당시에는 신학문이었던 생활미술을 공부했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아버지는 직접 줄리앙을 사다 주실 만큼 자상하고, 신문물과 사상에 열려있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엄마, 아내로만 남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려면 항상 책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그렇게 신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모더니즘 시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골동품과 같은 옛것을 좋아하고 존중하셨어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표본이신 셈이죠. 제가 어릴 때 그렇게 아버지를 쫓아다녔대요(웃음).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계시면 제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옆에 딱 붙어있었죠. 그런 저를 아버지는 참 많이 귀여워하셨어요.”

세련되고 우아한 감성, 정갈한 균형미가 돋보이는 매듭 공예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정적인 결과 분위기와는 달리 작업 방식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노동집약적이다. 과거에는 염색장, 해사장, 끈목장, 매듭장으로 구분되어 분업화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요즘에는 매듭장이 전 과정을 책임진다.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세고 작업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느림의 미학을 절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매듭은 생각이 깃든 그릇이자 거울이에요. 흐트러진 생각은 그대로 매듭에 드러나죠. 염색하고 실을 짜고 맺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도 완성되고 정돈된 아름다움을 보면 뿌듯해요. 그동안 순종, 철종, 고종시대의 의궤 매듭을 복원해왔는데, 생각해보면 효명세자에게 너무 감사해요. 의궤는 그전에도 있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다 남겨놓으셨거든요.”

개인으로서 또 사회인으로서 인생의 크고 작은 매듭을 지어온 그녀에게 올해는 특히 장인으로서 뜻깊은 해라고 한다. 자신의 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후계자인 노미자 선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또 하나의 매듭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잠재력을 적재적소에 발휘하며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한다. 바깥일이 많아지면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에 대한 소회였다.

돌이켜보면 4남매를 잘 키운 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매듭짓기였어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서 시간을 쪼갠다고는 했지만, 늘 한계에 부딪치며 정해진 시간과 싸워야 했어요. 아이들이 제가 하는 일을 응원해주고 자랑스러워해서 너무 고맙지만 엄마로서 미안함이 커요. 그동안 많은 작업을 해왔어도 매듭의 생활화가 정착되지 못한 점도 아쉽고요. 앞으로 가족들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더 많이 베풀고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요.”

인터뷰의 마지막 한 올을 엮으며 그녀는 요즘 따라 더 그립다는 아버지의 시 <밤비>의 한 구절을 읊었다. 이마에 서리는 해맑은 빗발 속엔/ 담홍(淡紅)빛 꽃다발이 송이송이 흩어지고/ 빗소리는 다시 수 없는 추억의 날개가 되어/ 내 가슴 위에 차단-한 화분(花粉)을 뿌리고 갑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지금도 그 꿈은 남아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에 살포시 내려앉은 시구(詩句) 사이로 아버지는 시를 짓고, 딸은 매듭을 짓는 장면이 흩날리는 듯했다. 힘찬 날갯짓으로 문화적 토양을 더욱 기름지게 가꾸며 오롯이 자신의 삶으로 일궈낸 장인의 모습은 나비매듭처럼 아름답고 청아했다.

 

. 사진/ 김신영 편집장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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