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곳곳에 숨은 영화의 냄새


부산
부산 해운대 영화의 거리 ⓒ트래비

함께인 듯 혼자 걷고, 혼자인 듯 함께 걸었다. 
우리의 부산 유람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와 동행하는 두 기자의 인생 여행
나만의 여행? 아니 우리만의 여행이다. 한국 영화에 빠져 제2의 삶을 한국에서 만들어 가는 영화 칼럼니스트이자 대중문화를 취재하는 나리카와 아야 기자와 음식이라는 카테고리로 한국과 일본에서 푸드라이터로 활동하는 박수진 기자.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 영화를 몽타주하여 국내 구석구석 여행길에 나섰다.

보수동
보수동 책방골목 맞은편의 부평깡통시장

●과거 속 현재, 그 자리 그대로


갈 곳도, 볼 것도 많다는 부산. 영화제를 담보로 우린 부산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은 남포동부터 해운대까지 곳곳에 숨은 영화의 냄새를 맡아 보는 것. 우선 반나절 남포동 일대를 돌아보기로 정했다. 부랴부랴 역 건너편에서 81번 버스를 탔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글·사진 박수진)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영화 <변호인>이 떠올랐다. “내 책 다시 주이소.” 어두운 밤 문을 닫으려는 서점 셔터를 붙잡고, 서점 주인을 바라보며 주인공 송우석(송강호)이 던진 대사다. 고시 공부를 포기하려고 책을 팔았다가 심경의 변화가 생겨 다시 책을 찾으러 온 그 장면.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침 햇볕 사이로 보이는 ‘보수 서점’ 사잇길이 과거로 이어지듯 뻗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 부부가 미군 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를 수집해 박스를 깔고 노점을 연 것이 이 책방골목의 시작이었다. 이후 60~70년대에는 70여 개 책방이 터를 잡으며 책방골목이 형성됐다고 한다. 그중 1987년에 오픈해 32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우리글방’에 잠시 머물렀다. 곳곳에 장식해 놓은 사진과 엽서를 구경하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가지런히 열을 맞춘 테이블과 소파가 책 한 권 들고 앉아 보길 기다리는 듯했다. 카페와 책방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나무계단, 그 사이사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는 골동품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부평깡통시장
부평깡통시장 초입에서 3대째 운영 중인 양산집

묵고 가이소!  

보수동 책방골목을 마주 보고 자리한 부평깡통시장. 120년 넘도록 우두커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인이 거주하며 장이 열리기 시작한 이후 ‘일한시장’이라 불리다가 1915년 ‘부정평시장’, 해방 이후 ‘부평시장’이 됐다고 하는데 내 기억은 ‘부평깡통시장’부터다.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할머니와 동행이 아니면 잘 오지 않던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에서 나오는 통조림을 거래하면서 ‘깡통시장’이라 불리게 됐다는 말도 할머니에게 들었다. 


부평시장 입구에서 조금 내려가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닭의 진수를 보여 주는 ‘거인통닭’, 할머니와 자주 들렀던 ‘양산집’이 있다. 그리고 반대로 되돌아 나와 아래로 꺾어 내려가면 쫄깃하게 맛있는 ‘이가네 떡볶이’, 아! 그 옆에는 어묵집이 있다. 그리고 더 깊숙이 들어가면 포장마차로 시작해 줄 서는 맛집이 된 ‘사거리분식’도 있다. 속사포처럼 기억 속 맛집 지도가 펼쳐진다. 먹는 얘길 하니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꼽히는 돼지국밥 한 그릇이 생각난다. 영화 <변호인>을 본 후 이상하게 모든 돼지국밥집 사장님 하면 김영애 배우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고로 묵은 빚은 돈 말고 얼굴하고 발로 갚는기라. 아, 자주 오라꼬 알겠나.” 안 되겠다. 양산집으로 가자.

 

이그조틱하고 노멀한 시장 속 한 컷  

양산집 골목 반대편으로 쭉 걸어 나오면 국제시장과 연결된다. ‘빈티지 거리’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바닥에 옷을 깔아 놓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취향대로 물건을 고를 수 있는 곳이다. 국제시장은 1948년 자유시장으로 불리다가 1950년 미군의 군용물자와 밀수품이 몰려들어 전국으로 공급되면서 ‘국제시장’으로 개칭됐다. 예전에 할머니가 이곳을 ‘도떼기시장’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빈티지 거리에 서 보니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국제시장을 가려는 내 목표는 하나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이곳의 대표 간판이 된 ‘꽃분이네’를 보기 위해서다. 별다를 건 없겠지만, ‘아오, 뭔가 이그조틱하고, 아프노말한’을 찾던 김봉남이 훗날의 앙드레 김이었다는 재미를 더해 준 꽃분이네 간판 사진 한 장은 남겨 보고 싶었다.          
 

국제시장의
국제시장의 포토존, 꽃분이네

거리의 영화지(地)  

<부영극장>, <대영극장>, <부산극장>…. 극장들이 밀집해 있던 곳,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된 남포동답다. 남포동 일대는 과히 영화 촬영지다. 국제시장에서 나와 부산근대역사관을 지나 용두산 공원에 도달했다. “왜 항상 당신만 희생을 해야 하냐구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황정민)의 아내 영자(김윤진)가 속상한 마음을 불쑥 내뱉던 그 장면. 그리고 두 사람이 앉았던 용두산 공원. 덕수가 영자의 말을 들으며 드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던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공원에서 나와 중앙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을 지나다 보니 “경찰은 짭새가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이오.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추라우.” 영화 <공조>에서 북한 형사 임철령(현빈)이 차기성(김주혁)의 오른팔과 격투를 벌이던 ‘화국반점’이 보인다. 이곳은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등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주변의 모습이 다 새 것으로 바뀌어 가는 요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부산이 더 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영화를 품은 바다, 
그리움의 해운대


부산 하면 첫 번째로 떠오는 단어가 영화다. 매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기 때문이다. 해운대 바닷가 무대에서 감독이나 배우들이 관객과 대화하는 ‘오픈 토크’ 등 바다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부산영화제의 매력이다.
(글·사진 나리카와 아야)

해운대
해운대 영화의 거리에 있는 영화 스타들의 핸드프린팅

아시아 최대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영화제는 1996년에 시작했다. 그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이 해운대 토박이 김지석 전 수석프로그래머였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영화인이었지만, 2017년 5월 칸국제영화제 출장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부산은 조금 슬프다. 그의 부재를 느끼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영화제에서 상영할지 검토하는 게 프로그래머의 일인데 봐야 할 영화는 1년 내내 봐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그래도 어떤 영화든 반드시 끝까지 본다. 그것이 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경의’라고 할 정도로 그들을 한없이 아끼던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신나 보이던 순간은 부산에 찾아온 영화인들을 부산 맛집에 데리고 갈 때였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부산영화제 단골이다. 그 이유를 인터뷰 때 물었더니 ‘간장게장을 먹고 싶어서’라고 했다. 부산이 간장게장이 유명한 건 아닌데 김지석 선생 덕에 그 맛을 본 후 반해 버린 것이다. 그가 그토록 맛있다는 간장게장이 있는 해운대 ‘마산게낙찜’이 궁금해졌다. 

고레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단골 ‘마산게낙찜’ 간장게장

고레에다의 입맛을 사로잡은 맛

오후 4시. 영화의 전당에서 프레스 배지를 받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입맛을 사로잡은 부산 해운대 영화의 거리 인근에 있는 ‘마산게낙찜’으로 갔다. 

행여 고레에다 감독이 오지는 않을까? 소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찰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배우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오다기리 죠가 아닌가! 게다가 우리 앞자리에 안내를 받았다. 영화제 스태프들과 동행하지 않고 가족끼리 이곳에 온 것이다. 해외까지 온 그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내심 설레고 있었다. 근데 주문을 받는 종업원도, 주문하는 그의 가족들도 소통이 되지 않는 듯 서로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국식 오지랖을 부려 보았다.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오다기리 죠 가족의 주문을 도와주고 게장을 먹는 데 열중했다. 먹어 보니 간장 맛이 깔끔하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부산은 짜고 매운 음식이 많다고 하지만, 부드러우면서 덜 달고 외국 사람 입맛에도 잘 맞는 것 같다. ‘마산게낙찜’, 영화제 기간 중 매일 많은 영화인이 찾는 맛집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청사포
청사포 ‘디아트 커피’

산토리니를 닮은 청사포  

해운대의 동쪽, 청사포에 있는 ‘디아트 커피’로 향했다. 부산에서 영화 취재를 하며 찾은,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카페다.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에 ‘디아트’는 남포동에 있었다. 웨이팅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인기 카페였고,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단골이기도 했다. 

그렇게 인기 많은 곳에서 왜 청사포로 이전했을까. 강경호 대표는 해운대 토박이다. “어느 날 청사포 내리막길을 가다가 바다를 바라보는데 너무 예뻤어요. 그리스 산토리니 같았죠.” 태어나고 자란 곳의 풍경은 너무나 당연해서 그 가치를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디아트 커피’ 2층에서는 바다를 내다볼 수 있다. 문득 영화제가 왜 서울 아닌 부산인지 김지석 선생님께 물었을 때 ‘바다가 있어서’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칸도 베네치아도 세계적인 영화제는 대부분 바닷가가 많다. 바다를 보면서 추천 커피를 마시며 김지석 선생님을 추억했다.

환상적인
환상적인 부산항대교 밑에 낚시꾼들

밤의 아름다움을 낚는 부산항대교  

밤에는 야경을 즐기기로 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부산 구석구석을 안내해 준 지인의 추천 장소로 가는 길에 그가 “두 사람은 겁이 없노, 이런 길을 오는데 무서워하지도 않네”라며 농담을 던졌다. 그의 말도 그런 게 영화에서 마약 거래가 이뤄지는 으슥한 부둣가의 장면처럼 큰 군함과 컨테이너가 가득한 다리 밑을 지나고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데 “여기는 국가시설입니다. 접근을 삼가해 주세요”라는 방송이 삼엄하게 들려왔다. 

알고 보니 우리가 도착한 곳은 부산항대교 아래였다. 2014년 개통된 이곳은 해운대와 남포동을 30분 만에 연결하는 총 길이 3,368m의 다리다. 멀리서 봐도 LED 경관조명이 다양한 색깔로 변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근데 다리 밑으로 와서 보니 또 다른 환상적인 빛을 뽐내며 밤 낚시하러 온 사람들과 돗자리를 펴고 야식으로 라면을 먹는 사람들, 아예 텐트를 치고 자는 사람들까지…. 부산의 일상과 빛나는 야경이 교차하는 영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LP바
LP바 ‘노가다’의 소품 오래된 영사기

경성대, 문화 골목의 아날로그 감성을 찍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 즈음 경성대 근처 골목에 있는 ‘문화(文化)골목’에 들어갔다. 식당, 술집, 꽃집 등 2층에 걸쳐 여러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문화골목’. 우선 1층 술집 ‘몽로’에서 야식을 먹고, 2층 LP바 ‘노가다(老歌多)’로 갔다. ‘문화골목’의 골목대장이라 불리는 건축가 최윤식씨의 아들 최시훈씨가 ‘노가다’ 주인이다. 바 안에 있는 약 1만3,000장의 LP나 CD는 최윤식씨가 대학생 때부터 40년 동안 모아온 수집품들.

카운터에 앉자마자 종이와 펜을 줬다. 어떤 노래를 신청해도 순식간에 1만3,000장의 LP 중에서 찾아낸다. 아날로그가 좋다. 옛날 노래로 할까 했지만 기분은 영화 <라라랜드>였다. 영화에 나온 몇 곡을 들려 달라고 했다. ‘노가다’에는 오래된 영사기를 비롯해 세월의 흔적을 느낄 만한 소품들이 많았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 딱이다! 생각했는데 역시, MBC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의 촬영지였다. 영화 <친구>를 각색한 드라마로 현빈과 김민준이 나왔다.

아버지가 시작한 ‘노가다’를 아들이 이어받은 건 3년 전. ‘어르신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콘셉트로 마니아층이 많다는데 최시훈씨가 주인이 되면서 젊은 사람들도 늘어났다. 새벽 2시. 바 안에 있는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내려왔다. 오늘의 엔딩 시간. 어딜 가나 영화를 느끼는 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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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감독의 한마디 
“영화는 나를 세계의 여러 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여행은 동행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행하다 보면 똬리처럼 소중한 인연이 연결된다. 영화제 기간 중 새롭게 알게 된 한 학부모를 통해 고레에다 감독을 만나는, 영화 같은 기적을 얻었다. 고레에다 감독이 강연차 광안리에 있는 부산일본인학교에 방문한 날, 그곳에 가게 된 것이다. 전교생 앞에 선 고레에다 감독, 부산을 찾는 이유 중 하나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언급했다.

“올해 24년째를 맞이한 멋진 영화제이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제입니다. 친구도 많이 있고 음식도 맛있고, 영화제는 음식이 맛있는지가 중요합니다”라고 재치를 발휘해 학생들을 웃게 했다. 그는 강연보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Q & A 시간을 가졌다. 그중 인상에 남는 대답을 남기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한다. 
“영화감독이 되고 좋았던 일은 무엇인가요?”


“영화 찍는 걸 좋아해서 일이 됐고, 생활이 된 것만으로도 정말 매일 즐겁습니다. 저는 대부분 일본에서 영화를 찍지만, 그 영화들이 외국 영화관이나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저를 온 세상의 여러 장소에 데려가 줘요. 이곳도 영화를 찍었기에 올 수 있었죠.”
 

글·사진 나리카와 아야, 박수진 에디터 트래비

[출처] 트래비 Tra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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