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우리 희망의 노래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미소, 옥석을 고르듯 신중하게 할 말을 가리는 조심성,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순간에도 상대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매너. 가수 김혁건(39)은 대체로 감정에 대한 절제와 진중함이 몸에 배있다. 그런 그에게도 대학원 입학 이후 13년 만에 받은 박사학위는 감추기 힘든 기쁨인 듯 했다. 학위취득 이후 가족들 사이에서 ‘김 박사’로 호칭이 바뀌었다는 부친의 말에 설핏 얼굴을 붉히던 그가 “복학을 결정해야 할 땐 이런 몸으로 학교에 다시 가는 게 창피해 포기할까 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학위 욕심이 생겨 더 열심히 공부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잠시만요! 재훈아, 얼른 와서 다리 좀 꼬아 줄래? 엉덩이 밑으로 소변 줄이 눌리지 않도록 조심해줘.” 짧은 대화 중에도 수시로 활동지원사의 손을 빌려 앉은 자세를 고쳐야 하는 몸으로 그는 얼마 전 <횡경막 마비군과 비마비군을 통한 복식호흡과 발성법 연구>라는 연구논문으로 고대하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희대 대학원 우수논문상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번 논문은 꼬박 2년을 투자해 거둔 결실이다. 혼자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척수장애를 안고 논문 준비를 위해 악전고투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조금 전까지 학위 논문 얘기에 함박웃음을 짓던 부친 김광영(69) 씨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사실 아버지가 이번 논문의 공동저자나 마찬가지지요. 전동휠체어를 타야 하는 저를 위해 수업 날마다 학교까지 직접 차로 태워다주신 아버지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어요. 컴퓨터 자판을 누를 수 없어 음성인식기에 미리 녹음한 뒤 하루 네 시간씩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입력 작업을 시켰을 뿐 논문 준비에 필요한 자료를 찾고, 측정에 참여한 피실험자 8명의 변화 추이를 기록하는 일까지 제가 직접 고생하며 쓴 실험논문이라 그만큼 성취감이 큽니다. 제 연구가 장애인들에게는 음악치료로, 비장애인들에겐 발성이나 보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선례로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1년 당시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각광받던 엠넷 뮤직페스티벌에서 락(Rock)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가수 김혁건은 실용음악학원에서 만나 가까워진 친구 이시하와 2003년 ‘더 크로스’란 록 밴드를 결성해 주목받던 정통 로커였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가죽바지와 부츠 차림으로 무대를 휘어잡던 더 크로스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가창력, 특전사에 자원입대해 군복무를 마쳤을 만큼 강단 있는 성격도 인기에 한 몫을 했다. 아직도 2만 명 이상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의 팬 카페는 사고 전까지 회원수가 항상 5만 명을 웃돌던 대형 커뮤니티였다.


“무대 활동이 줄어든 탓인지 그 사이 탈퇴한 분도 많지만, 지금껏 남아 있는 회원들과는 전보다 더 사이가 돈독해졌어요. 이제는 가수와 팬 사이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정을 나누는 관계가 됐죠. 큰 시련을 겪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팬들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새겨보게 됐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잊기 힘든 악몽과도 같다. 그에겐 불법 유턴 차량에 치어 전신마비 장애가 찾아온 2012년 3월 26일 밤이 그럴 것이다. 녹음 연습을 마친 뒤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김혁건은 그 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어 목 아랫부분에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지마비 환자가 됐다. 경추손상에 의한 전신마비. 2년 넘는 재활과 여섯 차례에 걸친 줄기세포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활동지원사 없이는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관리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고 해요. 지금도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건들면 찌릿한 통증만 전해질 뿐 어깨 아래쪽 다른 부분은 감각이 전혀 느껴지질 않아요.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병상에 누워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자학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 이렇게라도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예전처럼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고, 박사학위도 딴 제 자신이 대견하게 생각될 때도 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희망을 갖고 견디다 보면 또 이렇게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죠.”


그는 몇 년 전, 국가스텐 보컬 하현우가 <복면가왕>이란 가요 프로그램에서 불러 화제를 일으켰던 ‘돈 크라이(Don’t cry)’의 원곡 가수다. 하지만 김혁건은 자신이 더 이상 3옥타브를 넘나드는 고음으로 다시 이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사고 직후 그를 치료한 의사들의 말처럼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을 이룬 셈이기 때문이다.


“전신마비로 목 아래쪽의 신경이 모두 죽어버린 탓에 횡경막이 있는 아랫배에 힘을 줘 공기를 성대 위로 밀어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었어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병실에서 하모니카를 불며 폐활량을 늘리는 연습을 했더니 처음엔 250밀리리터밖에 안되던 폐활량이 650밀리리터까지 늘어났어요.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단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사고 이후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돌보기 시작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의 배를 지그시 눌러주자 마른 꽃대처럼 시들어가던 성대에서 기적처럼 고음이 흘러나왔다. 불의의 사고로 전처럼 소리를 내지 못하는 젊은 로커의 사연을 접한 서울대 로봇융합센터 방영봉 교수팀이 인위적으로 배의 횡경막을 눌러주는 자동복압장치를 개발해 선물한 덕분에 이제 그는 기계의 도움으로 맑은 고음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무대에 서는 그에게선 성대를 긁어대는 듯한 예전의 ‘스크레치 창법’을 들을 수 없다. 그 대신 김혁건은 고운 미성과 성악 발성으로 노래를 부르게 됐다. <스타킹>이나 <불후의 명곡> 등의 무대를 통해 록 밴드 ‘더 크로스’ 시절의 김혁건을 기억하던 팬들도 이제 지그시 눈을 감고 가사 하나 하나를 음미하며 노래하는 그에게서 삶의 희망을 확인한다. 그의 공연 모습을 기록한 유튜브 동영상에는 ‘가수 김혁건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이며 축복인지를 알게 됐다’는 희망의 댓글이 적지 않다.


 

 

“사고 이후 저 역시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었어요. 병원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 있으니 욕창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감각이 없어 마취도 하지 않고 썩은 살을 긁어내는 수술을 여러 번 받았어요. 사각사각, 내 몸에서 썩은 살을 긁어내는 소리를 귀로 듣고 있으니 산다는 게 너무 치욕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끝까지 믿고 응원해준 가족과 팬들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제 논문이나 노래도 누군가에게 삶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혁건은 요즘도 틈틈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관공서나 학교 등에 초청을 받아 삶의 희망을 전파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을 원망하기보다 도전을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팬들의 믿음에 보답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희망 강연’이라 이름 붙은 강의에서 또 누군가는 현실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세상을 살아가는 그를 보며 시련을 이겨낼 용기를 발견할 것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 보면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음악 작업도 할 수 있고, 스튜디오로 놀러온 일곱 살짜리 조카와 즐겁게 놀기도 하며 남들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몇 년 전 출간된 그의 희망에세이 《넌 할 수 있어》가 눈에 띄었다. 무심결에 책장을 펼치자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섰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그들의 진실된 사랑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벼랑 끝에서 나는 그들의 외침을 들었다. 넌 할 수 있어!’


희망은 항상 어디에나 있는 것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글 이종원 편집장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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