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l 통역사 안현모

 

‘제가 착석을 하고도 좀처럼 말문을 열지 못한 건 뜻밖에도 그녀가 인터뷰 첫마디부터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행복을 알고, 행복과 가까워지기 위해 걸어온 눈물 어린 여정이 살짝이나마 엿보이는 듯했습니다.’


프리랜서 영어통역사로 유명한 안현모(37)가 한 종교잡지에 기고한 기사의 진정성 있는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마음치유를 위한 그림을 그리는 김현정 화가를 인터뷰하고 난 뒤 쓴 기사는 인터뷰어가 받은 인상을 덧붙여 취재원의 생각과 감정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어 타인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옮기려는 태도가 엿보였다. 방송뉴스나 예능프로에서 달변가의 모습만 익히 봐왔던 터라 그녀를 글 쓰는 사람으로 만난 것이 꽤 신선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5년째, 매달 인터뷰 기사를 연재해오며 새로운 인물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다.


“매달 한 명씩 만나 인터뷰하는 게 제겐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크게 유명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임하는 분들을 섭외하고 있는데, 정말 많은 인생 공부가 되거든요. 그분들의 삶에 저를 빗대어 보면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지 고민해 보게 되죠.”


그녀는 1·2차 북미정상회담 소식을 전하는 CNN뉴스 동시통역, 미국의 권위 있는 대중음악 시상식 ‘빌보드 뮤직 어워드’ 생중계, 전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은 <어벤져스:엔드게임> 내한 기자회견 통역 등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화제의 현장에 선 경험이 많다. 그만큼 국내외 유명 인사들을 만날 기회도 많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톱스타와 저명 인사들을 만나는 인기 통역사가 매스컴의 무관심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인물들을 인터뷰해 공들여 글을 쓰는 일에 애정을 갖기란 쉽지 않을 터. 하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은 월드스타를 만나는 자리도 무척 영광스럽지만 그들과는 짧은 시간 함께할 뿐이에요. 오랜 시간 대화하며 공감을 나눈 사람들에게 저는 더 마음이 가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유명세를 떠나 평범한 이들과의 인연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전해진다.


 

 

 

사람과의 만남을 뜻 깊은 기억으로 간직하면서도 정작 그녀는 가장 인상에 남는 인터뷰이를 꼽으라는 질문에 무척 난감해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 2년 전, 프리랜서 통역사로 활동하기 이전에 4년간 SBS 방송기자로 재직했던 시절에도 사실 전달에는 자신 있지만 특정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를 담는 뉴스 작성은 영 어려워하던 마음 약한 기자였다. 취재를 해보면 각자의 입장에 수긍이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분석하는 대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경청하기에 그녀는 대화를 나눠본 상대에게 생각이 잘 통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마치 ‘만인의 소울메이트’ 같다고나 할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녀서인지 그녀에게 통역사라는 직업은 퍽 어울려 보인다. 인터뷰이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내용은 물론 의도까지 파악해 전달하는 것이 통역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며칠 밤을 새워 자료조사에 매달려가며 대상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는 것도 그들이 평소 갖고 있는 주관을 파악해 메시지를 왜곡 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쉽게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단어 선택 하나에도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더군다나 순수 동시통역보다 통역이 수반되는 방송프로를 진행하는 ‘통역 방송인’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기에 영향력이 큰 방송에는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임한다. 바르고 정확한 통역을 위해서는 외국어 실력이 우선시되지만 그녀는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주관이 그에 못지않게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통역 현장이든 방송 프로든 제가 서는 자리에는 항상 그날의 주인공으로 모셔놓은 분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얘기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청중이 그들에게 무엇을 궁금해 할지에 대해서만 집중해요. 오늘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중요하지 않죠. 주인공과 관객의 매개체 역할에만 충실하면 긴장감도 훨씬 줄어들고 능률도 올라요.”


 

 

통역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그날의 주인공을 향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 십분 공감하며 임하기에 그녀는 인간미 넘치는 통역사로 호평 받을 때가 많다.


그중 지난 해 빌보드 뮤직 어워드 현장을 국내 시청자들에게 생중계 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한 그룹 BTS가 영어로 수상소감을 전할 때 통역을 잠시 중단해 팬들이 가수의 목소리를 생생히 듣도록 했는가 하면, 가수 숀 멘데스의 무대가 끝난 후에는 “그가 요즘 BTS와 의 콜라보 작업을 원하고 있다”라며 풍부한 배경정보까지 전해 팬들이 가수를 더 친밀히 느끼도록 배려했다.


 

 

유명인의 소통을 돕는 역할만 하다보면 본인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기 마련일 텐데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직업적으로 조연을 자처하는 것일 뿐 자신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주연이라고 말하는 그녀. 영화나 드라마의 주연, 인기 순위 1등처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주인공의 기준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지가 그녀가 정의하는 주인공의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통역사라는 직업을 스스로 선택해 충분히 즐기고 있기에 그녀는‘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알면 삶의 주체가 돼요. 우리가 원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럴 때조차도 자신이 왜 일하고자 하는지 인지하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죠.저는 늘 배움을 위해 현재와 다른 경험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것 같아요.”


올바른 소통법을 공부하고 싶어 입학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중에게 세상의 다양한 소식을 전하고 싶어 입사한 SBS,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원활한 소통을 이끌고자 선택한 통역사. 항상 원하는 것을 좇다보니 그녀에게도 제법 화려한 이력이 쌓였지만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진로를 결정했던 적은 없다.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겠다고 판단되는 일을 주저 않고 선택한 결과들이었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뿌듯하고 감사해요. 그렇지만 대기업, 명문대 같은 간판만을 좋은 스펙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10년의 결혼생활도 이력이 될 수 있어요. 그 시간 속에서 분명 깨닫는 점이 있을 테니까요. 방송기자를 그만둔 이유도 안정적인 직업은 없어지더라도 다른 일을 통해 새로운 걸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직업은 바뀌었어도 전달자라는 역할은 놓지 않겠다는 그녀는 뉴스면 뉴스, 사람이면 사람, 자신에게 귀감이 된 콘텐츠라면 무엇이든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훌륭한 이야기 전달자이다. 자신이 감명 받은 콘텐츠가 다른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 공감을 이룰 때가 전달자로서 가장 보람찬 순간이다. 어쩌면 세상의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준비하는 그녀에게 주어진 선물일지 모른다. 타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됐다는 느낌을 받을 때 큰 기쁨을 얻는다는 그녀는 ‘응’이라는 뜻의 ‘ㅇㅇ’ 대신 ‘응, 알겠어’ 혹은 ‘이해했어’라고 정확히 적어 문자메시지를 보낼 만큼 일상생활에서조차 올바르게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규범화된 언어만 사용하자는 주의는 아니에요. 다만 성의있게 소통하고 싶은 거죠. 그러면 서로 마음이 더 잘 통할 테니까요. 저는 제가 받아든 콘텐츠를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정성껏 배달해 사람들과 같이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요.” 자신의 일에 남다른 정성을 쏟는 그녀를 보니 그녀가 들려줄 또 다른 세상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다.



글 한재원 기자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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