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자 할머니의 간장닭찜과 해파리냉채

 

경남 합천 행목마을 정 씨 댁에 4대 만에 딸이 태어났다. 얼마나 귀한 딸이었냐 하면 귀하다는 뜻의 사투리 ‘겨다’에서 따와 이름도 계자로 지을 정도였다. 집안 대대로 농사를 크게 지어 끼니 거른 적 없고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소녀는 어엿한 아가씨로 자라 혼례를 올렸다. “그라도 도시로 나가야 하지 안켔나.”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처럼 큰 물에서 지내라는 부모님의 뜻대로 부산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3천 원짜리 작은 월세방이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누는 아이가 늘면 세 들어 살기도 쉽지 않다며 반여동 집을 사서 들어가라고 귀띔했다. 시누가 빌려준 20만 원으로 당시 판자촌 철거민들의 이주지였던 반여동에 집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게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부산 해운대구 반여3동의 터줏대감 정계자(73) 할머니는 아직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말이 집이지 우리가 창도 내고, 구들도 놨다아이가. 수도도 없어서 물 이다가 밥 짓고 산에서 나무 해와 가꼬 불 때고 살았데이.”

 

 

그래도 내 집이 생긴 게 좋았다. 이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게 흘러갔다. “이리 없이 살 줄 몰랐데이. 그러니 여를 진즉 못 떠났지.” 술을 좋아하는 남편은 허구한 날 일을 빼먹기 일쑤였다. 남편은 당시 부산에서 꽤나 규모가 컸던 ‘동명목재’에 다녔지만 결근이 잦은 남편의 월급은 남들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근처 옷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래도 여섯 식구 생활하기에는 항상 쪼들렸다.

 

 

허투루 돈을 쓸 수 없어 외식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뛰어난 미각, 야무진 손맛으로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건 다 만들어주었다. 팔보채, 뼈다귀탕 등 그녀는 못하는 음식이 없다. 한 번 먹어본 음식은 뭐든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 5년 전 모임에 나갔다가 식당에서 맛본 찜닭을 흉내 내어 만든 간장닭찜은 이제 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모두 모이는 명절날이면 큰 솥에 닭 여섯 마리를 넣고 푹 졸여준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청양고추로 적당히 매콤함을 더하고 생강물과 후추로 잡내를 잡은 할머니표 닭찜을 맛본 뒤로 가족들은 굳이 밖에서 찜닭을 사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아주 쫄쫄 빤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먹을 거리 많은 명절에도 굳이 닭찜까지 빼놓지 않고 준비해 자식들을 기다린다.

 

 

오늘도 제일 자신 있는 닭찜을 손님에게 선보일 참이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듯 닭을 뚝딱 자르고, 다듬고, 양념을 넣어 냄비에 안친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닭찜이 익어가는 동안 해파리냉채가 먼저 상에 오른다. 입맛을 돋우기에는 새콤한 해파리냉채가 제격이다. 당근, 피망, 오이, 맛살, 달걀지단 등 색색의 재료에 특별한 수제소스가 곁들여진다. 겨자가루, 식초, 마늘, 설탕을 배합해 끓인 뒤 일주일간 삭혀 완성한 소스를 버무려 한입 넣으니 톡 쏘는 알싸한 맛과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다.


인생 황혼기에 찾아온 행복

 

 



 

그녀의 요리 솜씨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수십여 년 간 얼굴 맞대며 친척보다 더 가깝게 살아온 이웃들과 나눠 먹은 음식들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서울 손님 대접하는 김에 양을 넉넉히 하고 숟가락을 더 얹어 동네 사람들을 초대했다.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3년 전 남편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지내던 작은 집이 모처럼 복작복작하다.

 

 

“요 작은 디서 어찌 사 남매 키우고 살았는가 모르겠다. 이자는 혼자여서 여도 크다.” 20평 남짓한 집에는 단출한 살림이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혼자 사는 집에 어울리지 않게 석 대나 되는 냉장고가 떡하니 부엌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안에는 모두 자식들 먹일 음식이 한가득이다. 때맞춰 고추장, 된장, 김치뿐만 아니라 갖가지 밑반찬을 만들어 정성스레 싸놓는다.

 

 

“내가 갖다주면 좋은데 무거워 그라지 못하고 가지러 오라케라 한다 아이가. 아덜이 바로 못 오니까 냉장고에 쟁여두고 있는 기라.” 부지런히 몸을 놀려 자식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느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일찌감치 그 마음을 알았는지 사 남매는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가진 것 없는 부모를 원망도 할 법한데 돈 달라는 소리 안 하고 전부 좋은 짝 만나서 제가 벌은 걸로 결혼도 하고 귀여운 손주도 놓아주었다. 큰손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까지 들어갔으니 할머니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사위가 장모님 덕이라고 하대. 맞벌이하는 즈그 부부 대신해 내가 밥해 먹여 서울대 보낸기라고.” 그때 모질게 마음먹었으면 이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평상시에는 새색시처럼 얌전한 남편은 술만 마시면 딴사람이 되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잔소리가 낮부터 끊이질 않았고, 밤에는 술 취한 남편의 주정이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온종일 집안이 떠들썩했다. 갈라서자고 결심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참고 살아야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여자가 나가봐야 어디를 갈꼬, 여기에 뿌리박고 파묻혀야지 어쩌겄나.’ 그렇게 참고견디며 살다 보니 요즘처럼 좋은 날도 온 것이다. “참말로 살다 보니 뿌리박혀진 거다.”

 

 

이제는 애증의 대상이었던 남편도 하늘로 보내고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부지런히 여생을 즐기고 있다. 홍콩, 일본, 싱가포르 등지로 해외여행도 다니고, 봉사 활동도 열심이다. 3년 전부터는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솜씨 좋은 할머니쉐프 봉사단’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매월 1회 빵을 만들어 지역 내 어려운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이다. 덕분에 손주들이 좋아하는 빵도 손수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가난에 허덕인 세월이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바르게 자란 자식들과 토끼 같은 손주, 음식과 정을 나눈 이웃들이 있기에 이제는 어느 부자 부럽지 않다.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뿌리박고 살고 싶었던 바람대로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반여3동 터줏대감으로서, 그리고 할머니셰프 봉사단의 단원으로서 정계자 할머니의 삶은 오늘도 깊고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김윤미 기자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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