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 최초의 빛에서 최고의 빛으로 / 성시연

토마스 만의 유미주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클래식 선율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바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4악장 아다지에토. 주인공 구스타프 아센 바흐(소설에서는 작가, 영화에서는 작곡가)는 말러(음악) 애호가인 토마스 만과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보인다. 시절을 관통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아름다움을 완성한 이 위대한 예술가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예술가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말러 스페셜리스트’, ‘첫 여성 지휘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성시연(43)은 이에 화답하듯 포디엄 위의 생에 완전히 몰입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말러의 교향곡 2, 부활(Symphony No. 2 ‘Resurrection’)의 의미를 되새기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오늘도 다시 태어난다. 유리천장을 뚫고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서울시립교향악단 첫 여성 부지휘자, 첫 국공립 오케스트라 여성 예술단장인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2014~2017)를 역임한 그녀는 늘 최초와 함께했다. 하지만 발길을 돌려 과감히 유럽으로 거처를 옮기며 최초에서 최고를 향한 긴 여정에 올랐다. 그 지난한 길 위에 선 그녀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만나보았다. 그날, 봄기운은 음악의 편이었다.

사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여성 지휘자라는 말이 따라다녀요. 그런데 그냥 음악인으로 인식되는,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기를 원하는 것보다 스스로 먼저 생각의 틀을 깨야죠. 음악에는 정답도 끝도 없잖아요. 죽을 때까지 세상에 있는 무궁무진한 곡들 중 10분의 1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요(웃음).”

도약과 성장. 녀의 목표는 한결같다. 경기필과 서울시향은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오케스트라를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실험의 장이었다. 단거리를 마치고 장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승부수를 던지고 있는 그녀는 누군가 건넨 한마디를 종종 떠올린다. ‘To be your self.’ 타인에게 잘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나 자신으로 머물 수 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프로필을 각인시키는 것보다 음악의 방향성을 행복에 두는 길을 택한 것이다.

도약은 멀리 뛰기 위해 뒤로 약간 물러선다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성공과 실패는 반반의 승률이라 결정할 때 망설임이 있긴 했죠. 그런데 제 음악 커리어의 동반자인 어머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어요. 오케스트라 지휘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고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게 진짜 목표라면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셨거든요. 결국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의 차이, 즉 선택과 집중의 문제죠.”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던 어머니가 음악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일상에서 클래식을 접해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배우며 스스로 꿈을 키워나갔다.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 독일로 떠난 것도,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지휘로 전공을 바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유학 시절, 피아노를 하면서 식견을 넓히려고 다른 음악도 접했어요. 당시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가 이끄는 베를린필의 공연을 자주 보러 갔었죠. 그리고 다양한 비디오를 보다가 전쟁 당시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를 알게 됐어요. 지휘자의 퍼스낼리티 하나로 수많은 인원을 한데 모아 에너지를 끌어내는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죠. 나도 저런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휘자가 되기를 결심했어요.”

그렇게 조우한 지휘의 세계는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축소판이었다. 지휘자는 무엇보다 팀을 아우르는 포용력과 결단력을 갖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녀는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연주와 행정의 무게중심을 잡으며 경기필 만의 색과 결을 다듬어갔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남에게는 관대함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살피고 또 살핀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이 중요해요. 서로 일방적인 에너지로 가다 보면 지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거든요.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시민의식과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한 차원 높아졌어요. 단원들 개개인의 역량도 너무 훌륭하고, 이런 인재들을 확보한 단체들도 많이 있죠. 개인과 단체가 서로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려면 예산 편성과 지역 주민의 관심이 뒤따라야 해요. 개인의 실력과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앞으로 더 좋아지고 발전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클래식의 순수성과 대중성의 합을 위해 애쓰는 일. 그녀가 음악인으로서 지닌 사명감이다. 클래식 스타를 키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의 목표를 위해서는 음악인 스스로가 자기 일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 그래야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 모습은 어떤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온몸의 세포들은 내가 어디에 있든 이미 무대 위에 있다는 말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이상을 품고 있는 이 젊은 지휘자의 꿈을 여실히 드러낸다.

지휘자는 농부와 같아요. 수확을 위해 쉴 새 없이 애정을 주고 정성을 다해야 하는 존재죠. 하지만 자연의 섭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단원들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당근과 채찍을 주며 자연에 맡기는 거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무조건 끌고 갈 순 없거든요. 유기적인 요소가 더 많으니까요. 더 좋은 수확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맡겨야 하는 거죠. 모든 것을 책임지면서도 단원들이 주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자세가 필요해요.”

지휘자는 스스로 빛을 내면서도 오케스트라와 관객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빛날 수 있다. 어쩌면 무대라는 광활한 우주에서 지휘자는 항성이자 행성이 아닐까.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으로 되어가든 그녀는 신념의 빛을 따라 유유히 걸어간다. 그 발걸음 사이로 따뜻한 알토의 음성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듯하다. 말러 교향곡 24악장 근원의 빛’(Urlicht)을 싣고.

  

. 김신영 편집장

* 베를린 예술대학 피아노전공 석사(2001). 한스아이슬러 음대 지휘 전공 졸업(2006).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콩쿠르 우승(2006). 2회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 1위 없는 2(2007).

메인 및 서브: 박용빈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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