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 │ 바둑기사 오정아

바둑기사 오정아

 

바둑은 36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바둑판 위에서 두 선수가 흰 돌과 검은 돌을 번갈아 놓은 뒤 많은 집을 확보한 쪽이 승리하는 경기다. 제주 출신 바둑기사 오정아(27) 4단은 이 치열한 승부 속에서 매번 새롭고 무궁무진한 수(手)를 고민하는 바둑을 둘 때가 제일 행복하다.

 

“일곱 살 때 바둑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따라 기원에 다니면서 바둑을 처음 접했어요. 저보다 먼저 바둑을 시작한 언니보다 제가 더 잘하고 실력도 금세 늘었대요.” 나이에 비해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그녀는 여러 바둑대회에서 우승하며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제주 지역 한 기업인의 후원에 힘입어 열 살 어린 나이로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온 소녀는 장수영 9단의 도장에 들어가 누구보다 독하게 바둑 기술을 연마했다.

 

프로 입문이란 포부를 품은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바둑에만 매달렸다. 수(手)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면 밤새 복기와 연구를 거듭할 정도로 강한 집념을 가진 승부사의 기질.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1년, 40명이 출전한 여자연구생리그전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그녀는 촉망받는 프로 바둑기사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목표를 이루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녀에겐 바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도움을 준 후원자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중압감으로 그동안 적성이나 꿈에 대해 고민할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이다.

 

 

“프로 기사가 된 뒤 한동안은 이 길이 제 길이 맞는지 가늠해보는 시기를 보냈어요. 그러다 제가 그렇게 차분한 성격은 아닌데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제야 오래오래 바둑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보다 넓은 세계에서 다양한 대국을 치르며 청춘을 바치는 하루하루는 흥분 그 자체였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그녀는 2011년 지지옥션배본선 출전을 시작으로 2013년 제4회 인천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바둑 혼성페어 동메달, 같은 대회 바둑 여성단체 은메달 등의 성적을 거두며 무서운 기세로 선배 기사들을 위협했다. 공격적인 성향의 두터운 힘바둑을 무기로,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맞서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의 탄탄한 실력에 바둑계도 그녀를 주목했다. ‘서귀포의 바둑 여신’이라 불리며 프로 바둑기사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져나가는 그녀에게 ‘뼛속까지 바둑인’이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 무렵 출전한 대회 중 그녀는 조훈현 9단과 호흡을 맞춘 2014년 국수산맥 국제페어 바둑대회를 잊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수(國手)’라 불리는 최고의 바둑기사와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은 그녀의 바둑 인생을 한 단계 도약시켜줄 절호의 기회였다. 모든 기량을 쏟아붓겠다는 각오로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대국에 임한 결과는 공동 1위. 단독 1위는 지나치게 긴장한 그녀의 작은 실수로 놓치고 말았다.

 

“1위를 하고도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혼내기는커녕 직접 복기를 하며 새로운 수를 알려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승패를 떠나 후배를 아끼고 격려하는 조훈현 9단의 성품에 그녀는 큰 감명을 받고 승부에 몰입하는 프로의 자세를 배우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큰 무대에서의 대국 경험과 훌륭한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키워나간 그녀는 2014년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이후 대표팀의 핵심 인재로 떠오르며 2015년 제5회 황룡사배 5연승, 2017년 제7회 황룡사배 4연승 등 중요한 순간마다 한국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꾸준히 담당해오고 있다.

 

 

 

1년에 치르는 대국만 최소 50여 개, 숨 돌릴 겨를 없이 승부를 겨루다 보면 지칠 때도 있다. 대국에서는 단수가 상관없이 상대와의 심리전이나 그날의 컨디션이 승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녀 역시 예상 밖의 변수를 만나거나 상대의 기에 눌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좌절 대신 재도약을 모색하는 그녀는 생각처럼 수가 풀리지 않을 때면 바둑돌을 잠시 내려놓고 책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주로 인문학이나 문학 분야를 선호하는 편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주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길러주는 독서가 그녀에겐 훈련만큼이나 소중한 성장의 자양분이다.

 

프로의 길을 걸으면서 줄곧 병행해온 요가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요가로 스트레스를 풀고 정신을 맑게 하면 더욱 집중해서 대국에 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실망하지 않고 다음 경기에 매진할 힘이 생긴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뒷받침되어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수양해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국에서 이길 수 없다. 매일 국가대표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며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바둑판 앞에서 씨름하는 그녀의 미래가 어찌 어두울 수 있으랴. 자신이 둔 수에 대한 복기는 물론 다른 기사들의 기보를 연구하며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을 통해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알파고가 등장한 뒤부터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갈수록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해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수가 나와 있어요. 하루라도 공부를 게을리 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죠”라고 말하는 그녀는 인공지능이 제공한 정확한 복기와 분석을 토대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매일 바둑과 사투를 벌인다.

 

그녀는 지난해 안팎으로 좋은 일이 많았다. 6년 동안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온 바둑기사 이영구 9단과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도 포기한 채 중국에서 열 제9회 궁륭산병성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 출전해 무려 4강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개인적으로는 국제 대회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의미 깊은 대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최근 치른 대국 중 이 대회를 가장 아쉬웠던 경기로 꼽는다. 이기면 결승에 올라 좋고, 져도 고향 제주도에서 열기로 한 결혼 잔치를 예정대로 치르면 되기에 괜찮다는 해이한 마음에 실력 발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그녀는 바둑에서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론 적당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대국 하나하나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는 그녀에겐 어느덧 데뷔 9년 차의 관록이 느껴진다.

 

 

 

“중요한 대국 땐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데 오히려 그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지난번처럼 너무 긴장감이 없는 것도 문제고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국을 치르고 싶어요. 져도 중요한 수를 배웠다고 생각하면 모든 대국이 의미 있어요.”

 

올해 그녀는 제10회 궁륭산병성배, 제2회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 등 굵직한 국제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이 대회들에서 자신의 최고 성적을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 수 한 수를 두는 그 순간의 희열을 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바둑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一手不退)’다. 바둑을 시작한 지 어느덧 20여년, 그녀는 누구보다 한 번 둔 수는 물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면서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우승보다 더 큰 삶의 기쁨이다.

 

프로 전적 227승 192패(2019년 2월 기준)로 한국 여자 바둑기사 랭킹 5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정아 바둑기사. 한 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게 바둑이듯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에서 그녀는 이미 놓은 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나은 한 수, 보다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 그녀는 오늘도 신중히, 누구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바둑돌과 인생의 돌을 차분히 놓아간다.

 

 

글 조연혜 기자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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