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어요

실제의 김서형은 웃음도, 눈물도, 정도 많다. 그리고 외로움도 많다.

{p4}
/upload/woman/article/201902/thumb/39030-357803-sample.jpg


드라마 이 남긴 여운이 길다. 종영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사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짚어주는 스토리는 충격적이었고,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입시 전문 코디네이터 ‘김주영’을 연기한 김서형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주영은 감정의 동요를 전혀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맹독을 품은 야누스 같은 여자다. 김서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김주영을 연기해냈다. 올 블랙 의상으로 위압감을 주었고 올백 헤어스타일로 완벽한 성격의 그녀를 표현했다. 목소리, 말투, 눈빛, 걸음걸이…. 어느 것 하나 김주영이 아닌 것이 없었다.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땐 거절했어요. 전작 <이리와 안아줘>에서 사이코패스 기자를 연기해 연이어 센 캐릭터를 맡는다는 게 심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있었죠. 비록 특별 출연이긴 했지만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압박감이 상당했거든요. 그렇게 힘든 역할을 하면 아무래도 연기하는 동안만큼은 긴장하게 되니 끝나고 나면 몸이 아파요. 또 아플 생각을 하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절했죠.”

이후 김서형은 제작진으로부터 받은 시놉시스와 대본을 찬찬히 다시 읽었다. 볼수록 빠져드는 이 대본을 놓칠 수 없었다. 갈등하다가 소속사 매니저의 선택에 맡겼고,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매니저의 말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그렇게 김서형표 ‘김주영’이 탄생했다.

“우리 매니저가 촉이 좋아요.(웃음) 첫 촬영 후 매니저에게 ‘나한테 이걸 왜 하라고 했어?’라고 따졌어요. 힘드니까 괜히 매니저를 탓한 거죠. 근데 결국엔 제 선택이에요. 힘든 캐릭터지만 누구보다 잘해내고 싶었고,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전개를 보면서 저도 더 욕심을 부렸어요. 시청률이 좋아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숫자(시청률)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김서형은 을 위해 지독하리만치 혼자가 되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얼음장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김주영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혹독하게 자기를 외롭게 만들었다.

“극 중에서 같이 붙어 지냈던 (이)현진(‘조선생’ 역) 씨와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어요. 딸로 나왔던 조미녀(‘케이’ 역) 씨와는 더욱 거리를 두었죠. 그건 (염)정아(‘한서진’ 역) 언니와도 마찬가지였어요.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될지 모르는데 너무 친해지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처음부터 언니에게 ‘되도록 대화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다행히 언니도 이해해주었고요. 그러고 보니 간단한 인사 외에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네요. 김주영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는 왜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더 외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심지어는 매니저와도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죠.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어요. 그런데 저는 촬영 전에는 시시콜콜한 대화로 수다를 떨다가 카메라가 돌아가면 연기에 몰입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이전에도 여러 번 노력해봤지만 안 되더라고요. 이젠 제 연기 스타일을 스스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옆방에서 들려오는 ‘까르르’ 웃음소리, 동료 배우들이 수다 떠는 소리…. 어찌 부럽지 않았겠나. 모르긴 몰라도 혼자서 외로웠던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김서형은 그렇게 철저히 김주영이 됐다.

“외로웠어요. 한 인터뷰에서 ‘외로웠다’고 말했는데 그게 화제가 되면서 다른 배우들에게 좀 미안했어요.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을 텐데, 마치 저만 노력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쫑파티 때 정아 언니도, (이)태란(‘이수임’ 역) 씨도, (오)나라(‘진진희’ 역) 씨도 모두 힘들었다고 말하는데 아차 싶더라고요. 그들도 묵묵히 혼자 견뎌온 건데 저만 유별나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아차 싶었던 순간이 또 있었다. 6개월 동안 그녀를 보좌했던 이현진(‘조선생’ 역)과의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극 중 가장 많이 만나는 현진 씨를 신경 쓰지 못했던 게 가장 미안해요. 19회 촬영날이 되어서야 ‘함께 사진 찍자’고 하더군요. 인상적이었던 건 제 감정만 신경 쓰느라 미리 연습한 대로 연기하지 못했는데도 다 받아주더라고요. 종이를 던지기로 해놓고 가방을 던졌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연기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그만큼 ‘김주영’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죠.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 후론 말을 좀 걸기도 했어요. 인사만 하던 사이에서 밥은 먹었는지 묻는 사이로 발전한 거죠.(웃음)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대사보다 제 대사를 더 많이 봤대요. 제가 조금만 더 마음을 내려놓았다면 조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올 블랙 의상과 올백 헤어스타일…. 선뜻 도전할 수 없는 이 스타일은 김서형이기에 가능했다. 김서형은 스타일링 고민에 꽤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는 어떤 옷을 입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장은 평범해 보일 것 같고…. 고민 끝에 올 블랙으로 정했죠. 머리요? 원랜 커트 머리를 하려고 했는데 첫 촬영 당일에 올백으로 바꿨어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짱짱하게 묶어야 해서 촬영 내내 두통을 달고 살았어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괜히 화풀이를 하곤 했죠.(웃음)”
 

 

의 높은 시청률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김서형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방송 시청률이 1.7%였는데 2회 방송이 4.4%를 기록하더니, 23.8%로 끝났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수치다.

“첫 방송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어요. (김)정란(‘이명주’ 역) 언니가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 ‘이렇게 연기를 잘하고, 이렇게 영화처럼 연출하면 대체 앞으로 어떻게 연기하라는 거야?’라며 분노(?)했죠. 시청률보다 연기에 대한 걱정뿐이었어요. 정란 언니의 연기력과 감독님의 연출력이 대단했거든요. 그 장면이 시청자들을 유혹한 셈이죠. 그 후로 저와 다른 배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연기 경쟁을 했어요. 연기 좀 한다는 베테랑 배우들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데, 이 드라마가 안 될 수가 있겠어요?”

배우들은 유현미 작가와 조현탁 감독이 깔아놓은 판에서 널을 뛰었다.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 거기에 연기파 배우들의 미친 연기까지. 시너지였다.

“그동안 40대 여배우들, 그것도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동시에 나온 작품이 없었어요. 음…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연기할 작품이 없을까요? 아니라고 봐요. 있는데 안 쓰는 거예요. ‘좀 더 연륜 있는 배우가 했으면 좋았겠다’ 싶은 배역이 있는데도 제작진은 어린 배우를 선호하죠.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이 드라마가 40대 여배우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한몫했으면 좋겠어요.”

김서형의 목소리가 커졌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 대해 꼬집어 말했다. 25년 차 여배우의 소신이었다.

“채널이 많아지고 유튜브가 성행하면서 만들어지는 작품 수는 많아졌지만 정작 여배우가 활동할 수 있는 창구는 그대로예요. 영화는 드라마보다 더 보수적이죠. 시청자들의 눈도 높아졌어요. 과도기라고 생각해요. 다행인 건 드라마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장르의 한계에서도 벗어난 것 같고….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안정되겠죠.”

시청자들은 <아내의 유혹>에서 소리 지르던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그동안 악역만 맡았던 건 아니지만 <아내의 유혹>과 이 남긴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악역 전문 여배우로 꼽히기도 한다.

“<아내의 유혹>이 끝났을 때 다들 저더러 다른 역할은 못 할 거라고 했어요. 세도 너무 셌죠. 그 작품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센 역할을 많이 하긴 했네요. 그런데 작품이 주는 서사와 캐릭터의 결이 달랐기 때문에 연기가 같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을 많이 한 것뿐이지 유독 악역만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지고지순한 여자도 연기했고, 전문직 여성도 해봤죠. 악역을 맡았을 때 시청률이 좋았을 뿐이에요. 어쨌든 김주영도 악마는 아니지 않나요? 자식 때문에 생긴 열등감이든 패배감이든,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미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장르나 캐릭터, 대본이나 스태프 라인업 등을 면밀히 살피지 않는 편이다. 오로지 촉에 의존한다. 한마디로 끌리는 걸 선택한다.

“그동안 센 역할을 많이 했던 게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계기랄 것도 없었죠. 대신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동시에 제안받았을 때 괜히 더 마음이 가는 작품을 선택해요. 촉이죠. 재미있겠다 싶으면 작품이 크든 작든, 분량이 많든 적든 상관없어요. 제가 연기를 통해 힐링할 수 있다면 저예산이라도 합니다. 어쩔 땐 제가 작품을 찾아 나서기도 해요. 감독님한테 작품 좀 달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발랄하고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도 했어요. 영화 <봄>에선 차분한 캐릭터를 연기했고요. 곧 개봉하는 영화 <미스터 주>도 좀 가벼운 역할이에요.”

분명한 건 그녀는 지금 전성기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거다. 김서형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개인적으로 전성기라는 말은 싫어요. 저는 그동안 늘 똑같이 열심히 해왔는데 그걸 무시하는 것 같아 싫더라고요. 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잘 소화해서 제대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허투루 할 수가 없었어요. 어디에선 잘하고, 어디에선 대충 하는 성격이 못 돼요. 이 김서형의 인생작이라고 하는데 그건 제가 잘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요즘 받는 칭찬은 제가 했던 노력에 대한 보상 정도로 생각하려고요. 지금의 인기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몇 달 후엔 분위기가 차분해지겠죠. 10대 친구들도 저를 알아봐주는 건 좋네요.(웃음)”

연기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이동할 때도, 김서형은 매일 연기만 생각한다. 천생 배우다.

“배우로선 그렇지만 사람으로선 또 달라요. ‘센 언니’ 이미지라고 하는데 실제론 유쾌한 성격입니다. 거침없는 스타일이죠. 간혹 맡았던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생활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론 밝고 활기차요. 김서형이라는 사람은 연기를 하면서, 역할을 만나면서 성장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김서형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까?

“저는 과대평가됐어요. 데뷔를 일찍해 25년 차 배우지만 연기의 참맛을 알게 된 건 10년이 채 안 됐어요. 그전엔 ‘그냥’ 했었거든요. 항상 저 자신과 밀당을 했던 게 지난 25년을 버티게 한 것 같아요. 지금의 김서형이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미래의 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냥 한번 지켜보려고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김서형은 뭘 해도 되는 배우’라는 믿음을 주고 싶다는 거예요. 악역도, 멜로도, 코미디도, 일단 믿고 맡겨도 되는 배우요. 그거 하나면 돼요.”

다음 작품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계획은 없었다. 그녀답다.

“다음 작품…. 저도 궁금해요. 어떤 작품을 만날지 기대되고 설레죠. 아마 또 악역은 아닐 거예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두어 달 쉬면서 다음 작품에 대해 고민해보려고요. 찾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일해야죠. 오래 쉬진 않을 거예요.”  

{p4}








[출처] 우먼센스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


포스트 공유하기     
우먼센스

우먼센스

정기구독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