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 균열에서 균형으로 / 연출가 김태훈

연출가란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아니라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에요. 모든 것은 끝이 아닌 과정 중에 있거든요. 그래야 관객이든 배우든 연출이든 생각이라는 것에 이를 수 있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시각으로 자신만의 무대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연출가 김태훈(45)은 다시, 새로운 과정 중에 있다. 깊이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처럼, 깊이를 위해 넓이라는 과정을 택한 것이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뒤늦게 연극계로 뛰어들어 10년간의 조연출 생활을 거친 후 연출가의 길을 걷기까지, 그의 삶의 캔버스는 겹겹의 선명한 색으로 덧칠해졌다.

학창시절에는 배우를 하고 싶었고, 잘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런데 공연 중 의도치 않게 약속들에 대한 실수가 있었죠. 애드리브로 위기를 면했지만, 연출 선생님께 많이 혼났어요. 관객들도 좋아하는데 왜 그러실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죠. 그 후 배우와 연출이 뭘까 고민하면서 막연히 연출을 꿈꾸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죠. 하루는 날을 새며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마흔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죠.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무대, ()에 대한 찬란한 투쟁

존 로건(John Logan) 극본의 연극 <레드>는 생에 대한 찬란한 투쟁이자 비극이다. 추상표현주의의 한 갈래인 색면 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Mark Rothko)와 가상 인물 켄의 대립과 화합으로 직조된 서사에서 인물의 특수성은 보편성을 확보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디오니소스의 감성과 무질서, 아폴론의 이성과 균형, 생멸(生滅)과 생사(生死), 신구(新舊),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자아와 타자 등, 수많은 대립항의 메타포인 레드블랙.’ 이러한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예술가의 리얼리티는 보편적인 인간 삶의 리얼리티로 치환된다.

처음 텍스트를 읽었을 때 말에 속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방대한 분량의 대사와 수사적 용어들은 그저 중요한 도구에 불과했거든요. 시즌을 거듭하면서 켄과의 작업이 로스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켄은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인물이라서 그만큼 더 민감하고 세밀하게 표현해야 했죠. 이번 시즌에는 켄에 더 집중했는데, 감정선, 시선, 조명 등 순간들을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어쩌면 켄의 모습은 로스코의 젊은 시절이라고 볼 수 있어요. 미숙하지만 예술가로서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들이 로스코를 통해 터져 나오니까요.”

극본의 힘을 믿는다는 그는 특히 리딩 작업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2주간 배우들과 텍스트 작업을 하면서 인물들이 각 상황에서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해야 정서를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고, 나머지 움직임들은 저절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로스코를 부각시키기 위해 첫 등장과 조명, 음악을 철저히 심리상태에 맞췄어요. 그래야 켄의 사유와 성장이 더욱 깊어지니까요. 로스코도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블랙으로 가는 과정을 겪잖아요. 결핍이 많은 인물이지만 그게 오히려 그를 단단하게 만들어줬어요. 어떤 무리에 속해 뿌리내리기를 원했던 욕망이 혁신과 혁명, 새로움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겠죠. 관객들도 처음에는 주로 세대로 보시다가 인물의 내면을 읽기 시작하셨는데, 그게 제 의도이긴 했어요.”

<레드>가 로스코의 미완성 유작이었듯, 연극 <레드>도 누군가에게 매번 새롭게 읽힐 완성을 향한 미완성작이다. 예술과 인생도 마찬가지. 결국 레드와 블랙이 충돌하는 내적 투쟁은 자타불이(自他不二), 즉 자아와 타자의 분리가 아닌 화합과 공존을 향하는 것이 아닐까. 극본의 힘이 돋보이는 또 다른 연출작 <대학살의 신>에서는 <레드>에 내재된 문화자본과 교양의 속성, 인간의 욕망 등이 다른 조도와 각도에서 비춰지고 있다. 인물들의 다양한 갈등 양상을 대사로 견인하고 있는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이 블랙코미디는 자기모순과 결핍에 함몰된 인간의 민낯을 적절한 톤 앤 매너로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문명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이 누군가를 대학살하고 죽인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어요. 열등감에 쌓인 결핍 덩어리인 주인공 4명의 심리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려면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하죠. 요소 하나하나가 진정성을 잃지 않고 전체 상황에서 웃겨야 진짜 코미디가 되니까요. 어떤 면에선 <레드>보다 더 힘들어요(웃음).”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인 두 중산층 부부가 교양과 품위를 위시하며 타인과 구별짓기하는 위선적인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지식인의 허상과 계급적(계층적) 폭력성이 짙게 깔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교양이란 무엇일까.

“(비판적 시각에서) 교양이란 아름다운 겉옷 같아요. 교양을 쌓는다는 건 더 비싸고 화려한 옷을 걸치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거죠. 그래서 교양은 자신을 보호하고 포장하기 위한 차별적인 용어이기도 해요. 이 작품이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극본이라는 것도 주목해볼 만하죠. 프랑스는 스스로 계급투쟁을 이뤄낸 사회이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또 다른 계급이 남아있고, 이는 문화적 우월주의로 드러나고 있잖아요.”

평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그는 앞으로 첨예한 심리 싸움이 펼쳐지는 작품과 창작극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동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며 감동까지 전할 수 있는 믿고 보는 연출이 되고 싶다고 첨언했다. 연극은 정확하되 무언가를 규정짓지 않고 늘 열어둬야 한다는 말도. 로스코가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았던 것처럼.

연출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발전하게끔 만들어야 해요. 하나의 생물과 같은 공연에서 합은 가장 중요하니까요. 로스코가 덧칠하며 작품을 완성했듯이 제가 연출한 작품들도 시즌을 거듭하면서 밑에 있던 색들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문득 로스코가 켄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네 인생은 저 밖에 있으니까.” 누구나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자기 앞의 문을 열고 나아가야 한다. 그 육중한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고,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숨 가쁘게 달려온 김태훈 연출가 역시 그 문 앞에 서 있다.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던지며.

 

. 사진 김신영 편집장

 

*국내연출: 뮤지컬 <시카고><빌리엘리어트><원스>, 연극 <피카소의 여인들>. 연출: 연극 <레드>(2013·15·16·19), <대학살의 신>(2017·19).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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